누가 ‘지역감정’을 말하는가 (3)
- DJ정권 그리고 강준만의 희한한 ‘노선’과 ‘행태’
강준만은 월간 <인물과 사상> 12월호의 ‘독자의 반론에 답한다’라는 코너를 빌어 이상한 논리 하나를 새롭게 전개한다.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란의 딜레마”라는 제목의 글에서다.

그는 여기서 김대중 정권을 비판한다. 김 정권이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선이 빚는 딜레마’에 빠져 악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거기서 비판의 대상은 김대중 정권이 아니다. 강준만이 비판의 타깃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반 독자들이고 일반 국민들이다.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란의 딜레마에 빠져 잘못된 비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의 ‘노선’과 ‘행태’

그러나 강준만의 이 주장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강준만 자신도 자기가 하는 말에 그렇게 썩 만족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김대중 정권이 코너에 몰리고 있고 그래서 과거에 자신이 주장한 사항들이 대거 빗나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김대중 정권과 자신의 비호를 위해 뭔가 새로운 논리를 하나 만들어내기는 해야겠는데 아직은 마땅한 논리가 생각나지 않아 대강 얼버무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강준만은 '자기 개혁에 소홀한 현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마저 왜 수구 언론의 준동으로 매도되어야 하는 건지'를 묻고 있는 어느 독자의 글에 대한 답변 형식을 빌어(강준만은 이 글을 통해 독자에게 3번이나 답을 한 셈이 된다. 그가 이 질문에 대해 얼마나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싶다. 그의 답변이 몹시 궁색해 보이는 건 아마 이런 때문이리라), 김대중 정권의 속성을 ‘노선’과 ‘행태’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 다음 질문을 던진 독자가 실은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란의 딜레마에 빠져 잘못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고 말한다(무식한 탓이겠지만, 사실 나는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란의 딜레마”라는 이 수사가 도무지 수상하기만 하다. 이게 문법에 충실한 구문이기나 한 것인지 몇 번을 읽어봐도 참 아리송한 문장이다).

좀 길더라도 맥락이 닿는 데까지 옮겨보기로 하겠다. 주장하는 바가 얼른 잡히지 않을 뿐더러 강준만 자신조차도 이 글의 앞뒤에서 다소간은 중언부언하는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10.25 재보선 결과 역시 여당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 여당은 이젠 무얼 좀 깨달았을까?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딜레마에 빠지면 냉철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슨 딜레마인가?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선이 빚는 딜레마이다.

‘노선’으로 보자면, 현 정권은 ‘개혁정권’이다. 그러나 ‘행태’의 관점에서 보자면 역대 정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건 마치 진보세력이건 보수세력이건 ‘일상적 파시즘’에 관한 한 다를 게 없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오히려 개혁이나 진보를 표방한 집단이 수구세력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면 훨씬 더 욕을 먹게 돼 있다. 사람들의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선’ 중심의 개혁과 비전을 역설해 왔다. 그는 ‘행태’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노선’을 본(本)으로 보고 ‘행태’를 말(末)로 본 것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수구 기득권 세력은 개혁을 좌초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수구 기득권 세력이 오직 노선만을 공격하는 것으론 개혁을 좌초시키기 어렵다. 오히려 그들은 행태를 더 공격한다. 공격할 건수는 무궁무진하다. 현 정권이 아예 빌미를 주지 않겠다고 조심했어도 공격할 건수는 많을 터인데 그걸 소홀히 했으니 이야기는 끝난 거다.

현 정권의 위기는 최근에 발생한 게 아니다. 집권 초부터 시작된 것이다. 수구 기득권 세력은 집권 초부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분열주의 책략을 쓰기 시작했는데, 현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거니와 오히려 그 책략을 돕는 쪽으로 행동했다, 왜? 현 정권은 ‘노선’ 중심의 개혁에만 미쳐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노선’ 중심의 개혁을 위해서라도 구태의연한 행태를 고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을 정도로 미쳐 있었던 것이다.

10.25 재보선은 현 정권이 ‘행태’가 ‘노선’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걸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걸 웅변해 주었다(10.25 재보선의 결과를 자신이 규정한 ‘노선’과 ‘행태‘의 논리로 푸는 것을 보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좀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내가 선거구민으로 있는 구로을의 경우, 그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강준만이 말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구로 아파트 재개발로 인한 DJ 정권 지지 세력의 대량 이탈 등이 그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으니 모든 걸 자신의 틀 속에서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의 한계를 보는 듯만 싶다.). 국가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딜레마에서 탈출할 길은 없는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죽어야 산다. 바로 그게 답이다. 기존 행태를 혁명적으로 바꾸자면 단기적으로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죽는 건 아니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1.12. p.p. 165-166

그러니까 ‘노선’과 ‘행태’를 구분하여 전하고자 하는 강준만의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현 정권은 ‘노선’에서 보자면 개혁 노선이다. 그러나 그 ‘행태’는 아직도 수구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김대중 정권을 비판할 때는 으레 ‘노선’이 아닌 ‘행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김대중 정권의 노선은 ‘개혁정권’이고 그러므로 ‘노선’이 아닌 ‘행태’를 두고 비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비판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독자에게 “김 정권의 문제는 ‘행태’이지 ‘노선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수구 기득권 세력의 ’행태‘에 대해선 더할 나위 없이 관대한 사람들이 왜 김 정권에게선 오직 그 문제만을 발견하는 건지 그 점도 의심해보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하고 있다.

‘노선’과 ‘행태’는 별개인가?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강준만의 주장에 따르면 현 정권은 개혁을 하자고 하면서도 그 실천에 있어서는 역대 정권들과 바를 바가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잘못된 ‘행태’를 그냥 두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잘못이라 지적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강준만이 말하는 ‘노선’과 ‘행태’의 구분이라는 게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그건 다만 말장난에 불과하다. ‘딜레마’에 빠져서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준만 자신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지 않은가? ‘개혁’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행태’를 합리화 하겠다는 그 야무진 생각만 놓아버린다면 이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한 집단의 ‘노선’은 그 집단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지 ‘노선’ 따로 ‘행태’ 따로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강준만의 말처럼 ‘노선’은 단지 그것을 ‘천명’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고 ‘행태’와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개혁’에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개혁에 성공하지 못할 정권이 어디 있겠는가? 개혁을 부르짖는 모든 사람은 이미 개혁에 성공하지 않았겠는가?

역대 정권 가운데 개혁을 주창하지 않는 정권은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 ‘수구 기득권 세력’ 혹은 ‘수구 집단’임을 표방한 정권은 없었다. 예를 들어, 강준만이 독재정권이라 부르는 전두환의 5공 정권도 개혁을 주창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당명마저도 ‘민주정의당’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건 강준만식으로 말하자면 ‘민주정의’를 노선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러나 민주정의당이 과연 말 그대로의 ‘민주정의’를 실현하였는가? 그들이 말한 개혁을 이뤘는가? 나아가서 우리가 과연 5공 정권에 ‘개혁’ 정당이라는 이름을 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아마 모두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인가? 개혁 혹은 혁신을 부르짖은 그들에게 왜 ‘개혁’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할 수 없는가? 이유는 하나다. 이념상으로는 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이 주창한 이념은 결코 개혁에 값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이 주창한 이념은 왜 개혁에 값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의 개혁을 개혁이라 보지 않는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이 또한 답은 한 가지다. ‘개혁’이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닌 때문이다. 말로는 누구라도 개혁을 외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몸소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행태’와 분리된 ‘노선’의 천명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누구라도 개혁을 외칠 수는 있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쉽지만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모든 정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어 왔지만 그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강준만은 대체 왜 지금 갑작스럽게 ‘노선’과 ‘행태‘ 타령인 것인가? 왜 새삼스레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선이 빚는 딜레마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노선’이 아니라 ‘행태’다

그렇다. 강준만이 느닷없이 ‘노선’과 ‘행태’를 구분하고 나온 것은 새삼스런 일이다. 김대중 정권의 ‘노선’이 개혁적임은 집권 시에 이미 천명한 바 있다(사실 이전의 정권들 역시도 집권 초기엔 모두 자신들이 ‘개혁적’임을 천명했다고 봐도 좋다).

그러므로 관건은 그렇게 천명한 그 ‘노선’을 김대중 정권이 얼마나 명실상부하게 추진해 나가느냐 하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김대중 정권의 성패 여부가 ‘노선’이 아니라 ‘행태’에 모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준만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에게 본은 노선에 있으므로 노선이 아닌 행태를 들어 김 정권을 공격하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비판이므로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행태’가 아닌 ‘노선’을 비판해야 하는 경우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강준만은 이에 대해 분명한 답변은 하지 않고 있다. 강준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화는 이뤄졌다. 독자가 생각하는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독자는 현 정권의 문제점을 빨리 개선할 수 있도록 수구 신문에 힘을 실어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데, 이는 독자의 ‘노선’이 수구 신문의 ‘노선’과 같다는 걸 의미하는가? 그래서 북한과의 냉전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수구 신문은 김 정권이 조금만 서민층을 배려하는 정책을 펴면 ‘사회주의’ 한다고 공격을 퍼붓던데, 독자는 김 정권이 사회주의 못하게끔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건가?

설마 그렇지 않으리라 믿는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오늘날의 개혁이라는 건 군사 독재정권 시절처럼 그 구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수구 기득권 세력과 비교하여 김 정권의 문제는 ‘행태’이지 ‘노선’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구 기득권 세력의 ‘행태’에 대해선 더할 나위 없이 관대한 사람들이 왜 김 정권에게선 오직 그 문제만을 발견하는 건지, 그 점도 의심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 <월간 인물과 사상> 2001.12. p.p. 165-166.

‘노선’이란 하나의 정당을 바로 그 정당일 수 있게 하는 이를테면 정체성의 문제일 터다. 그러나 ‘행태’가 뒷받침되지 않는 ‘노선’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예를 들어 농민 정책을 ‘노선’으로 하는 ‘농민당’이 있다고 할 때 그 ‘노선’을 비판하는 경우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물론 ‘농민’ 정책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농민당’을 ‘농민당’이게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민당’을 비판하는 경우란 오히려 ‘농민당’이 그 ‘노선’에 걸맞은 ‘행태’를 취하지 못하는 때일 것이다. 비판이란 결국 ‘노선’이라기보다는 ‘행태’에 모아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강준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구분은 김 대중 정권을 위해 억지 춘향식으로 갖다 붙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굳이 이런 구분이 없이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란 결국 수구 기득권 세력은 나쁜 놈들이고 현 정권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놈들보다는 나으니까 비판은 당연히 그놈들한테 먼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쉬운 이야기를 강준만은 대체 왜 저렇듯 어렵게 하고 있는가?

<2002-11-26 오전 11:04:23>



 
- '노선'이 '행태'를 합리화하는 이 아동티한 멘탈리티를 청산할 날은 언제인가? <200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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