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2006/08/13 22:52 / 통신보안
아끼는 후배가 있었다. 후배라고 했지만, 한 살 터울로 거의 친구나 진배없는 후배였다. 어릴 때는 한 집에서 살았고, 학교도 줄곧 한 해 터울로 같은 데를 다녔다. 흔히 '불알 친구'라 부르는, 서로에 대해 모를 게 하나 없는 그런 사이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멀어져 있다가 몇 해 전에 이 후배를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그래서 더 가깝게 지냈다. 모든 걸 드러내고 살기 힘든 경쟁 사회에서 모든 걸 다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할말 아니 할말 다 하면서 몇 년 동안을 그렇게 함께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이 으레 그렇듯이, 몇 해 뒤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른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인 끝에 사이가 멀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어느날 내가 적을 두고 있던 회사의 공개게시판에 '아는 사람'의 이름으로 글 하나가 올라왔다.

XX 한 넘, 하oo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나는 하oo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oo의 XX 한 정체를 알고싶은 분은 연락 주세요.

 
대략 이같은 내용의 글이었다(여기서 'XX'은 아름답지 않은 단어다). 길지도 않은, 내 기억으로는 단 세 줄의 글이었다. 하지만 그 게시물이 내게 입힌 상처는 '깊고 컸다'.

게시물의 아이피를 확인한 결과 그 후배의 집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외마디가 절로 나왔다. '배신감'이라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다. 무엇보다 창피했고,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래도 사치한 감정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조회수는 이미 천문학적인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비난섞인 리플이 달리기 시작했고, 비난의 강도와 리플의 빈도가 걷잡을 수 없이 높고 빨라져갔다. 대책이 없었다.  내용이 사실인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게시판에 '잘 아는 사람'의 비난 글이 떴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실제로 '연락'한 사람이 많았고, 거기서 얻은 '내가 알지 못 하는' 또다른 정보가 유비통신으로 파도를 타고 있었다. 몇 바퀴를 돌아 내게 전해지는 것도 있었고 게시판을 통해서도 그런 '이상한 얘기'가 확대재생산되면서 끊임없이 나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른바 '열린 사회의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적이 '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방이 적(?)인 상황이었다. "니 배때지에는 사시미칼 안 들어가나 보자"면서 오밤중에 회사 현관까지 쫓아와 전화를 걸어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저 게시물은 한순간에 나를 '그들의 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부적으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우군'이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삐딱한 시선'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식의 눈길이 줄곧 주변을 감싸고 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잘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장차는 우군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일이겠기에 내가 그들 입장이었다고 해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였다.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과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는 것. 그러나 대응을 하지 않는 경우 '아무말 안 하는 거 보니 뭔가 구린 구석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네' 식의 반응이 뒤따를 게 뻔했고, 그게 아니다며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봤자 구구한 억측으로 말이 또다른 말을 낳거나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는 식으로 비약될 게 뻔했다.

어떤 경우라도 이제 사건 이전의 상태로 나를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영락없이 "**한 넘"이 되어 견딜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특히 결코 선의적이지 않은 '연락'을 통해 만들어지고 자기 감정을 더 해 유포되는 그 사실 아닌 '사실'은 가공할만한 위력을 갖는 것이었다.

그랬다. 폭로의 주체가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가 그것을 깨는 것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일종의 굴레였다. 

'아는 사람'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이 그 상대의 백 마디 말을 무력화하고도 남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그때 처음 절실하게 느꼈다.

이 사건은 다행히(?) 그 한번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일은 상당 기간 나로 하여금 "세상을 헛살았다"고 하는 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그것은 내게 어떻게도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남겼고,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앞선 글의 댓글에서 어떤 분이 "당사자도 아니면서 뭘 그리 이상하게 격한 감정을 보이느냐"고 했다.

뜨끔했다. '아닌 척' '객관적인 척' 글을 쓰고 있었지만 확실히 나는 이상하다싶을 정도의 격한 반응을 내비치고 있었다. 글이 초점을 잃고 버벅거린 것도 실은 이같은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한 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경험치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위의 '하드윤미' 김 기자가 쓴 기사를 읽으면서, 그리고 기어이 그 원본 사진을 구해보면서 든 생각은 "아는 넘이 더 무섭다"는 사실의 재확인이다.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와 내 주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더 정확히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폭로되는 진실이 아닌 사실, 혹은 특정한 사건에 맞춰서 내 주변 사정에 밝은 이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태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인신공격성 폭로이다.

'아는 사람'에 의한 폭로가 갖는 가장 큰 위험성은 그 폭로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있다. 이같은 폭로에는 누구라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입게 되는 데미지 상처는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크다.
   

"인간은 얼마나 야비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내가 하고 있는 말이다.

바로 내 얘기다. 결국 나는 내 경험치를 벗어나지 못한 내 얘기를 하면서 애써 객관적인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노현정을 변호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X파일 건을 들어 어줍잖게도 내 변명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씁쓸하다. 그리고 참 덥다. <통신보안>



<덧붙이는 글>
나는 기본적으로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신공격성 폭로'에 반대한다. 동시에 이같은 폭로에 부화뇌동하여 그 대상을 물어뜯고 무자비한 악플을 날리는 행위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야비하고 저열한 행동 양식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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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경구, 그리고 아는 사람

    Tracked from 하민혁의 통신보안 2009/05/11 13:47 Löschung

    설경구와 송윤아의 결혼 발표를 보면서 내 일처럼 흐뭇해 했는데, 거기에 살짝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설경구 전처의 친언니가 올렸다는 글로 어제부터 인터넷이 시끌벅적합니다. 설경구가 이혼남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친구를 보면서 얼굴에 살짝 그늘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저 문제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설경구, 그 얼굴에 햇살을..쥔장이 이래뵈도 이런 쪽에 살짝 조예가 있습니다. 아니, 이혼에 대해 그렇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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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Xeno 2006/08/14 09:19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글 잘 읽었습니다 ^^*
    한 사람이 실수로 적은 글들이 5년후 10년후에 엠파스에서 검색되어질 날이 ;; 두렵습니다.
    제가 적은 글들도 어딘가에 저장되고 있을테죠 T^T
    이런것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인신공격성 폭로, 악플을 안달겠죠~
    네이버나 다음에서 시스템 오류로 닉네임이 실명으로 확 바뀌었으면 좋겠네요 ㅋ

  4. 오즈 2006/08/14 10:3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잘 읽었습니다....
    인신공격성 폭로는 파도를 한번 타기 시작하면,,,
    정말 무서운 것 같습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누구도 먼지 안 나는 인생 살지 못할텐데...
    정말 두려워요...

  5. aa 2006/08/14 14:42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개인이 ip하나로 집주소 조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 하민혁 2006/08/14 17:40  편집/삭제  댓글 주소

      1. 저 후배는 고정 아이피 썼구요. 2. 당시 그 게시판은 내가 공동 대표였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게시판은 아니었구요. 3. 유동 아이피라고 해도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집주소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게 그렇게 중요한 사항인가요? -_-

    • 하하 2010/12/28 02:26  편집/삭제  댓글 주소

      작성 연도로 봤을 때 최소 5-6년 전 이야기인데 개인이 집에서 고정아이피라니..... 흠…

  6. 상록 2006/08/15 20:5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개인적인 일이 공적인, 사회적인 사건이 되는 순간이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님의 일은 어떤 규모의 사회적인 일이었을까요?
    노현정 씨의 일이 개인적인 일에 대한 가십거리이기만 했으면 덜 처참하겠습니다.
    님의 일처럼 '개인'에 대한 '비열한 공개', '인신공격성 폭로'이기만 하다면 저도 단순히 '개인에 대해 비난'만 하고 말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일과, 그 같은 일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며, 그 일을 한 분을 분연히 비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곧 있겠다는 '2탄'이 궁금해지는 것은, 노현정 씨 스스로 '사회적인 사건'으로 재등장함으로써 지금의 문제적 위치에 올라선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수위를 다투는 공영 방송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성 아나운서가, 대기업이라는 명목을 쉬 달 수 있는 남성과,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밀월을 하고 결혼을 결정했다.'

    '양극화'의 한쪽 '극단'에 서 있는 듯한 심리적 압박감에, '된장'으로 범벅이 된 세상에서, 범죄로부터 풀려나는 '그토록 다양한 방법'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좌절감을 뒤집어 쓰고서,

    아무 골머리도 썩이지 않고 접해 왔던, '순수해 보이기 그지 없었던' 이로부터 '속물 근성'의 배신을 당하고서, 흥분해 나대는 것이

    그렇게도 자제해야 하는 일인가요?

    그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착실한 신랑감의 조건을 갖춘 남자친구'와 사귀는 도중에 '더 큰 거물'을 소개를 받아서, 1개월 정도 양다리를 걸쳤다가, 그 '거물'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같이 분노해 주는 것이 '민심'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이 아니어야 합니다. 노현정 씨에 대해 알려진 '카더라 통신'은 사실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마저도 '된장'에 범벅이 되는 꼴을 다른 쪽 극단에 서 있는 것 같은 우리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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