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의 전성시대'는 갔다. 그리고 ... 지금은 '농담의 전성시대'다.

진지한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 진지한 이야기가 하나의 농담이나 코메디가 되어버린 시대, 그리하여 진지함이 무력화된 시대. 그렇게 진지한 이야기는 괄호밖으로 밀려나고 코메디언만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같은 시대상을 웅변으로 보여주었던 베스트셀러가 하나 있다.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이라는 책이다.

어느 위대한 소설가가 애석하게도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회복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병원의 자기 방에서 3개월 동안이나 타자기 앞에 앉아 소설을 쓰고 또 썼다. 마침내 소설이 완성되자 소설가는 환호를 터뜨리며 원고를 들고 원장에게 가지고 갔다.
원장이 그 원고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장군은 말 위에 올라타 소리를 힘차게 질렀다. '이럇, 이럇-'"
원장은 재빨리 나머지 페이지를 죽 훑어 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5백 페이지 모두 '이럇-'이라는 말밖에 없잖아요?"
"맞아요. 그 말은 아주 고집스런 놈이었으니까요."

'이럇, 이럇, 이럇-.' 내가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고집스런 말(馬). 내 그대에게 무슨 말을 달리 할 수 있으리? 이건 대단히 따분한 일이다.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는 게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계속 반복할 것이다. 그대를 사랑하므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럇, 이럇, 이럇!'이 아니라, '이하동문'하고 가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이 책을 읽는 일은 '대단히 따분한 일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는가'. 이 책은 똑같은 이야기를 끝도 없이 반복하고 있다.

라즈니쉬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책 전체를 일관하여 진리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이러니하게 그 말할 수 없음을 끝없이 말하고 있다. 이유는 하나다. 고집스런 말(馬)과 같은 우리를 사랑하고 있어서다.

한 사내가 이층버스 안에서 함께 타고 있던 여자 승객을 때렸다는 이유로 고소되었다. 치안판사가 그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하였다.
"글쎄요, 판사님. 그게 이렇게 된 겁니다. 그녀는 아래층 내 옆 좌석에 앉아 있었죠. 그런데 그녀가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꺼내더니 다시 핸드백을 닫고 지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갑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더니 지갑을 닫고 다시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 지갑을 넣고 핸드백을 다시 닫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차장이 윗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꺼내더니 핸드백을 닫고 지갑을 열고 그 속에 조금 전에 꺼냈던 동전을 다시 넣고 지갑을 닫고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넣고 핸드백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차장이 다시 내려오는 것을 보고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꺼내더니 핸드백을 닫고 지갑을 열고 동전을 꺼내고...."
그럴 때 판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
판사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당신, 날 미치게 만들 거요?"
사내가 말했다.
"내가 바로 그랬다니까요."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

배꼽(오쇼 라즈니쉬)

나도 그랬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느낌이 꼭 그러하였다. 이 책의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그 '우주적인 농담'들이 나를 미치게 했다. 아아, 나는 이제 그가 우리를 그만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하동문'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이 책의 판매부수는 물경 이백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가히 놀라운 인기도라고 할 수 있다. 순전한 농담들, 말장난에 다름아닌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이 책이 저만큼이나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도무지 한갓되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이 책의 어떤 점이 독자들의 저 대단한 열광을 있게 한 것일까.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독서 인구의 태반이 '시간 보내기'로 책을 읽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책의 저 엄청난 판매부수는 이같은 사정과 크게 무관하지 않을 듯도 싶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이라는 게 모두 시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것들이어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사정 하나로 저 경이로운 판매부수를 다 설명한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이 책의 판매부수가 너무 많지를 않은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광고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광고는 전 매스컴을 모두 동원한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농담의 전성시대


농담의 전성 시대!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 사회의 특성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말장난이나 농담 따먹기가 난무하고 있는 사회, 우리는 지금 농담이 전 사회를 횡행하며 그 성가를 한껏 발휘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고 농담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그런 시대를.

이런 사회에서는 진지하고 심각한 모든 것은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웃기는 사람이다. 하기에 사람들은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조차도 그것을 전혀 농담인 양 말하고 만다.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오직 코메디언들 뿐이다. 그들만이 심각하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웃기는 사람들'이므로.

나로서는 이같은 현상이 썩 바람직해뵈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런 현상을 있게 한 일단의 원인이 별로 바람직스럽지 않아 보여서다

농담이 전 사회를 휩쓸고 있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의와 권위의 부재 현상이 있다. 농담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곧 정의가 부재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과 권위가 상실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정의도 어떤 권위도 갖고 있지를 못하다. 대체 우리 사회의 어디에서 규범으로 삼을만한 정의와 사표로서 섬길만한 권위를 찾아볼 수가 있던가.


정의와 권위의 부재


사회의 극심한 변혁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정의와 권위를 상실해버렸다. 여기서 그 상실의 역사를 모두 더듬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로 이즈음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현재에도 여전히 경험하고 있다.

'정의 사회 구현'을 국정 지표로 삼았던 그 정의의 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정의의 상실을 경험한 바 있으며 권위의 상징이랄 수 있는 스승의 표리부동한 언행에서 우리는 바로 그 권위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제의 불출마에 대한 표명이 오늘의 출마에 대한 변으로 바뀌고 '무엇을 걸고서' 지키겠다던 어제의 발언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 오늘 식언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를 온통 휘감고 있는 저 농담의 징후가 발견되는 지점이다. 일종의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다.

[배꼽]이라는 책에 대한 저 이상한 열광은 바로 이같은 사회 현상과 맥이 닿아 있다. 일간 스포츠 신문의 매일을 장식하고 있는 맹구 시리즈나 요지경 시리즈, 그리고 한때 베스트셀러의 수위 다툼을 벌였다는 최불암, YS, DJ 시리즈가 불티나게 읽히고 있는 이상한 시대고 야릇한 사회다. 이같은 사회에서 그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읽으나 마나 한 이야기 살짝 들춰보기..


무튼 이 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성공은 독자들의 독서 열기를 한껏 고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야흐로 기백만 부의 책 판매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일단 출판계의 치하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더 이상을 얘기해봐야 기껏 딴지 이상이 되기 힘들다.


한 새가 다른 새에게 물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농담 하나만 더 듣고 그만하기로 한다. 사회적인 병리 현상 말고 독자의 열광을 낳은 다른 또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는 이야기다. 이 농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함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늘 남의 뒤만 따라다니고 있는거지? 도대체 나는 왜 이 책을 사게 되었던 거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듣기에 그 책이 꽤 재미있는 책이래, 듣기에는 말이야.


한 무리의 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데, 한 새가 다른 새에게 물었다.
"왜 우리는 늘 이 멍청한 리더의 뒤만 따라다니지?"
그러자 다른 새가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언젠가 듣기에 그만이 지도를 갖고 있대."

지도라.... 사실 그 누구도 지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대는 누구를, 훌륭하고 성스런 누구를 추종하며 그들이 지도를 갖고 있고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글>
위에 옮기는 글은 '배꼽'이라는 책을 읽고 십 수 해 전에 적었던 글입니다. 당시 농담이 전 사회를 횡횡하는 현상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었는데 지금 보니 살짝 거시기합니다. 미네르바 열풍이 뜨겁습니다. 미네르바 열풍을 보면서 문득 저 한 무리의 새 우화가 생각나서 '거시기'함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더 정확히는 매일 한 꼭지씩의 포스팅을 하겠다는 저 '지키지 못할 약속'에 매인 포스팅입니다 -_-)
그런데 이 포스팅으로 또 뚜드러맞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글을 올렸던 당시에도 배꼽 독자들로부터 살짝 뚜드러맞은 기억이 있는데 말이지요 이번에는 어설프게 미네르바까지 끌어들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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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KIN 2009/01/13 08:25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저 당시에는 마침표를 사용하셨군요. ^^

    • 하민혁 2009/01/13 17:56  편집/삭제  댓글 주소

      지금도 마침표 사용합니다 단 업무에서만요
      블로그에서 마침표를 안 찍는 건 글쓰기 연습중이어서 그렇습니다 ^^

  4. outsider 2009/01/13 11:1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어떤 논쟁에서 블로거를 대할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해야 되는데 말이죠. 그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프렌들리하다가도 민감한 이슈에 지적을 하거나 비판을 하면 적이 되기도 하고 말이죠. 아무튼 조그만 블로고스피어에서 '파퓰리즘'으로 접근할 것인가 소신껏 포스팅 할 것인가 그것이 살짝 문제인거 같기도 하네요^^.

    저는 하민혁님의 포스팅에 공감/비판을 떠나서 (올)블로고스피어에서 '색다른' 관점의 포스팅을 보는것이 좋네요.

    이 동영상 보면서 살짝 힘내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NY1lpIf5Jmg

    • 하민혁 2009/01/13 18:10  편집/삭제  댓글 주소

      남겨주신 동영상 보고 용기 백배하여 두두두두~ 글 하나 만들어 올렸습니다 ^^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해야지요 그런데 저도 그렇기는 하지만 저보다 더 안 되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같습니다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당연히 어느 한 케이스에서 같은 의견이었다고 해서 다른 케이스에서도 같을 수는 없는 건데요 어느 한 분야에서 같은 의견이면 모든 케이스에서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그만큼 많은 때문이 아닌가싶습니다

      나랑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에서도 한사코 같기를 강제하려는 모습을 보면 때로 저 사람이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그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아요 특히 그동안 비교적 안다고 여겨온 이가 그럴 때는 더욱이요

      무튼 다른 건 그냥 다르다고 인정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 이 친구는 이 점에서 나랑 다르구나 하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그건 아니라고 본다는 포스팅을 써서 엮거나 하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감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말이지요

      두두두두~ 쳐서 올린 글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데 늘 그렇듯이 글을 쓰다보니 약간 업되는 바람에 역시 이번에도 또 살짝 오버한 거 아닌가싶네요 꺼리 주셔서 고맙습니다

  5. moohan 2009/01/13 13:1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개인적으로, 오늘 책을 주문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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