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거짓이 없다. (....)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그것과 말할 수 있으며 넋의 교제가 가능하며 그것들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동화의 깊은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 없이는 얼마나 현실이 궁핍한가를 현실은 모르고 있다. 많은 고대의 현자들이 말해 준 신화는 실지로 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목격한 아주 커다란 태초의 현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호오(好惡)의 감정이 약간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와 고은 사이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고은이라는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런 거냐고 정색하고 물어오면 그 답이 궁하긴 하지만 암튼 그렇다  

세상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어디 그렇게 한 두 마디로 똑 부러지게 설명이 되는 일이던가. 굳이 밝혀야 하는 자리라면 한 두 가지 챙겨서 말하지 못할 바는 아니겠지만 여기서 굳이 그런 무리까지 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나의 서가에는 고은의 책이 별로 없다. 3권이 있을 뿐이니, 그가 100 여 권이 넘는 책을 낸 것에 비한다면, 그리고 나의 상당한 책 수집벽에 비추어본다면 이건 사실 여간한 감정이 아니다. 지금껏 고은의 소설 [화엄경]을 읽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닌 것이다.  

특히 화엄경의 경우, 기왕의 싫은 감정에다 작가가 환속한 사람이고 이 소설이 그런 이에 의해 쓰인 '불가 소설'이라는 점에서 저 거부감의 다른 일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읽은 그의 [절을 찾아서]라는 책이 준 실망감 내지는 반감도 또다른 일조를 했고.

소설 [화엄경]의 광고 공세는 대단했다. 안 사보고는 못 배길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야 비로소 이 소설을 읽었다 바로 위에서 밝힌 몇 가지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것도 처음부터 책을 사서 읽은 것은 아니다. 그저 잠깐 읽고 치울 생각으로 책을 빌렸다. "'91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을 한 작품인데다, 일전에 읽은 [만인보]가 인상적이었다는 점도 일정 부분 작용했지만 직접적인 영향은 책의 뒷표지에 씌어 있는 이문열의 글 때문이었다.

이문열은 여기서 소설 [화엄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기독교 문학으로는 [천로역정]이 있고, 시적으로는 단테의 [신곡]이 있지만 솔직이 소설 [화엄경]이 주는 감동은 그 두 작품을 뛰어넘는다. 소설 [화엄경]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참됨의 아름다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다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과 잃어버림의 아름다움이 있고, 낯섬의 아름다움, 뒤틀림의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서는 자칫 잡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관능의 세계도 아름다움이고,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도 아름다움이다.


참 엄청시런 찬사다. 암튼, 이 소설을 완독했다(이런 책을 완독하다니..대단하다!) 근데 할 말이 없다. 뭐라고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가? 암튼 그 비슷한 기분이다
 

나는 저 남섬부주 사바세계에서 이곳으로 오는 손님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어요. 나는 많은 손님을 인도했어요. 그런데 그대처럼 이렇게 힘든 승천의 여행을 힘겨워하지도 않고 잘도 따라오는 손님은 처음이었어요. (....) 그대는 33천 에 닿을 만치 많은 공부를 했어요.
높이 높이 오를 수록 사바세계 사람들의 힘은 다하지요. 그래서 아무나 이곳으로 데려올 수 없어요. 데려오다가는 숨 막혀 죽거나 그가 살던 땅으로 추락하거나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마음대로 못하지요. 모든 일의 궁극은 자신에게만 있으니까요. 의존이란, 그리고 남의 힘이란 이 세계 어디에서도 지극히 허망한 것이지요.


소설에서 마야부인을 만나고 난 선재를 33천으로 안내하면서 그 안내를 맡은 하늘 여자가 선재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 어쩌면 내겐 이 소설을 얘기할만한 힘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늘나라로 오르다 숨이 막혀 죽는 저 여행자처럼 말이다.

소설 한 권을 다 읽었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사람을 살짝 허탈하게 만든다.
 

이유를 함 찾아보고싶은 이가 있다면, 클릭!

소설 [화엄경]은 한 번 읽고 버려둘 수 없는 책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불교 경전의 하나인 화엄경 입법계품을 전거로 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화엄경은 부처님의 설법 초기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하나로 편찬된 것은 오히려 법화경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그 중에서 입법계품은 가장 오래된 경전 성립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략)
이 화엄경 입법계품이 바로 선재의 구도이기도 하다. 그는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행을 구족하기 위하여 남인도 여행에 나서서 53인의 스승을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처음의 문수 보살과 마지막 보현 보살의 가르침으로 대단원을 이루어 그가 찾는 바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어느때는 불법과는 상관없는 바라문, 노예, 장사꾼, 뱃사공, 소녀와 창녀, 신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진리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드넓은 확신이 여기에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입법계품-- 뿐만 아니라 화엄경 --의 세계는 인도 전체와 서역 일대 그리고 중국까지 아우르고 있다(이 문장은 요약된것임). 말하자면 이런 커다란 세계를 현실적인 무대로 해서 어린 선재의 순례를 그렇게 큰 무대의 제공으로 달성시킨 것이다.
진리는 무한하다는 암시와 함께 화엄경 입법계품의 세계는 실로 우렁찬 바 있다.
대교향악! 바로 그것이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은 바로 이 선재 동자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어디까지가 원전에 근거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고은의 창작에 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좀 더 나은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건 비유컨대 이 소설 읽기에 순례지의 지도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선재의 여정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여행의 경로를 알려주는 지도가 일면 유용하달 수 있겠지만 그러나 소설을 읽는 데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도리어 우리의 (상상) 여행을 방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예컨대 강 위나 숲속이나 산정, 혹은 꿈속이나 하늘 나라를 여행하는데 그런 지도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필요하고도 중요한 건 소설 [화엄경]이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공간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footnote]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엄경 입법계품의 원전을 대강 뒤적거려봤다.[/footnote], 오히려 소설 [화엄경]이 소설로서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footnote]이에 대해서는 단조로운 구성과 읽기의 지루함을 들어 내 생각의 일단을 이미 밝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행여 저런 사설로 말미암아 이 소설의 성공 여부에 대한 나의 평가가 자칫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오히려 매우 긍정적이다.[/footnote]

소설 [화엄경]은 성공적인 소설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내가 꼽는 가장 두드러진 요인은 단연 작가의 화려 무쌍한 문장력이다. 가히 천의무봉이랄수 있는 문체와 그 대단한 울림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 읽기는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어서다.

하나의 문장 안에서도 전혀 자유로운 주술 관계나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한 제멋대로의 시제 표현들이 그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다른 소설에서라면 금방 눈에 띄고 당장 글의 흐름을 방해하게 될 그런 불일치의 문장이 여기에서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의 격식을 갖춘 문장보다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거침없이 전개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의 울림으로 글 읽는 즐거움을 실컷 맛보게 하고 있다.

여기서는 격식을 갖춘 문장을 되려 답답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그런 류의 문장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런 활달함과 장쾌함이 있다.[footnote]아쉬운 점이라면 이같은 활달하고 장쾌한 맛이 뒤로 갈수록 엷어지게 된다는 것이다.[/footnote]  문체상의 아름다움을 떠나서도 이 소설은 읽을 만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정말 많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끝없는 진리행의 길을 나선 어린 나그네 선재의 까마득한 역정을 그리고 있다. 잠시 그 여정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고은의 소설 화엄경

고은의 소설 화엄경



소아강의 새벽에 문수 보살을 만나 시작되는 어린 나그네 선재의 길은 강나루를 지나고 산을 넘어 바다와 호수와 안개와 저자거리와 승원으로 이어진다. 광야와 사막을 건너고 골짜기와 들녘을 지난다. 그리하여 다시 강으로 산으로 하늘로 이어져간다
 
진리는 아무데도 없어. 그러나 진리를 찾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진리와 함께 있어. 진리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흐르는 물이나 그대와 같은 길손의 마음에 들어 있어.


이 길에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마치 부서지는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됨의 아름다움에다 거룩함의 아름다움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 비어있음의 아름다움 잃어버림의 아름다움 낯섬의 아름다움 틀림의 아름다움 관능 세계의 아름다움,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의 아름다움까지가 이 길에는 있다
 

어린 선재는 길에서 살고 길만이 그의 참다운 집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행복에도 머무르지 않고 진리를 찾아서 끝없이 걸어가는 자의 길에만 익숙하고 있었다.

지나가거라 나그네여, 나그네여. 지나가거라, 나그네여.
모든 길은 지나가기 위하여 이루어졌구나.
모든 길은 지나가며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벋어 있구나.


이 길에는 삶과 죽음이 있고 사랑과 우정이 있고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눈물이 있다.
꿈과 현실이 윤회와 환생이 허무와 희망이 슬픔과 행복이 또한 외로움이 그리움이 괴로움이 고독이 고통이 법열이 있다. 황홀함과 무상함이 있고 장엄함과 고요함과 안락함이 있다. 한 알의 모래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있고 나그네의 여수가 있다
 

멀기 때문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먼 곳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깨워서 모든 사람의 고독과 고민으로부터 건져지게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먼 곳이 없다면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저 먼 곳에 해탈한 존자가 있다. 어린 나그네는 먼 곳을 위해서 한 군데의 사랑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아까웁도다. 도련님이여
그 사랑을 등지고
머나먼 남쪽으로
구름 밑을 걸어가는도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만이 진리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아무런 자아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 있던 선재 자신은 이제 없는 것이다. 그는 세계를 세계 자체로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한 곳에서 선재는 멀어져서 마침내 한 점이 된다. 그리고 그 점이 없어진다.

이 세계에서 만나는 일은
아무리 이름없는 일일지라도
어느 날 헤어지는 일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아무리 이름없는 헤어짐일지라도
어느 날 어느 달밤 만났으므로 헤어지나니
바야흐로 헤어진 이들은 만났으며
아아, 바람과 때는 흐르나니
어느 만남이나 다시 헤어지나니 ....


이 길에는 아리따운 소녀와 지혜로운 소년과 행상 나그네와 늙은 사냥꾼과 동굴 속 은자와 강나루의 사공과 고기잡이 어부와 산속의 농부와 재물이 많은 부자와 자애로운 의사와 술 취한 방랑자와 승원의 수행자와 악한 성주와 춤추는 무희와 미친 노인과 몸을 파는 창녀와 눈썹이 빠진 문둥이와 사랑스러운 부인이 있다.
이 길에는 또한 첫사랑 소녀와의 안타까운 이별이 있고 늙은 장님의 슬픈 노래와 그녀가 본 마지막 만월이 있다.
 

빈 하늘 빈 길을 누가 비었다고 하랴.
빈 것은 비지 않고 가득하므로
가득한 소마주 술잔에 넘치는 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하므로
저문 날 먼 곳의 숲도 하늘도 빈 어둠으로 가득하여라.


이 길에는 안개가 있고 흐르는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새벽강의 모래톱이 하릴없는 나룻배가 시끄러운 저자 거리가 그리고 떠가는 흰 구름이 있다.
불모의 광야와 열사의 사막과 하얀 눈의 고원과 바람부는 산정과 불의 골짜기와 지하의 호수와 푸른 초원과 저문 들녘과 천상의 하늘이 있다.
 

오랜 남녘땅 나그네 길이 이제
북녘땅을 향하는구나
배고플 때 바라보던 남십자성
환한 별빛을 등지고
억만겁 무량겁 과거를 등지고
가노니 보살의 길
억만겁 무량겁의 내일에 이어졌구나
문수의 지혜 만난 이래
온갖 스승 찾아 떠돌았건만
아직도 찾을 스승의 얼굴이여
풀 끝의 이슬이여
풀 끝의 이슬이여
흐린 날 구름 사이의 조각조각
푸른 하늘이여

버리기 어려운 것 버린 일 없이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찾을 수 없음이여, 법이여
빈 물에 뜬 물결이여
집을 짓는 자 물결에 지어라
나라 세우는 자 물결에 세워라
그때 비로소 8만 4천의 괴로움 사라지리라


허두에서 적었듯이 이 소설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도 그 뭔가의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릴없는 이야기만을 더하게 하고 있다. 내 중언부언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안타까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60개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가 다루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쉰세 분의 스승의 행복이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장을 찾아다닌 행복이여
이제 그 행복 다하여
나 스스로 가야 할 길의 행복이여


저 도저한 구도의 길에 온전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일 수 있겠지만 보다는 저 많은 이야기들을, 거기에 담겨 있는 그 치열한 아름다움과 행복한 깨달음을 하나하나 풀어서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더 근본적인 이유일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 소설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자에게 직접 읽어보랄 수 밖에는 없는 일일 터다.

모쪼록 이 글이 누군가에게 한 가닥의 그리움으로 남아 언젠가 이 소설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믿음과 서원으로 다아가 책읽기의 지겨움을 견뎌갈 수 있게 하기를 기대해본다.
 

그리움 없이
어찌 이 세계에
한 송이 꽃을 피겠는가
그리움 없이
어찌 이 세계에
한 송이 꽃 피고 지겠는가

그리움 없이
그리움 없이
어찌 나에게
찾아갈 곳 있겠는가


만약 그대 깊은 서원과 믿음이 없었던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 그 멀고 먼 역정의 시련을 감당하여 여러 남쪽나라 스승을
찾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자못 고달픔에 겨워 어디선가 홱
돌아서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도다.
아니 몇 번 찾아 다닌 것으로 작은 열매를 딴 것으로 만족하여
더 큰 열매들이 있는 산을 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도다.


위쪽에 있는 시는 선재 동자가 보현 보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고 아래쪽 글은 문수 보살이 어렵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선재 동자에게 보내고 있는 찬가의 일부다.
소설 [화엄경]을 읽는 일은 어쩌면 선재 동자의 여행에 못지 않게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선재 동자의 그리움과 서원과 믿음이 있다면 그 일은 틀림없이 기꺼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때로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이, 또 때로는 이야기의 진부함이 독자를 한없는 지루함과 무감각에로 이끌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작가의 쾌한 문장과 깊이있는 성찰들이 이내 씻어줄 것이고 그리하여 아린 사랑의 이야기와 진리를 찾는 즐거움으로 독자를 안내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선재 동자의 그리움과 믿음과 서원을 가슴에 안고서, 이제 가라 소설 [화엄경]에의 길을. 진리에의 길을.
 

가라. 한 나뭇가지가 길을 가리키지 않느냐.
나무는 지난 날을 알고 바람에 흔들리며
또한 한 사람이 갈 길을 알고 가지를 뻗는구나.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단호한 이별이어야 한다'.
광야를 알고 세계를 알고 싶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 가야 한다.
'끝없는 길에 끝이 나타날 때까지'.
그러니 가라. 선재 동자의 길을 좇아서. 그 길을 넘어서. 삼매의 노래를 들으며.
 

내 삶이 길 위에 있을진대
내가 어느 스승을 찾으랴
길이 내 어버이, 길이 내 스승이매
이 길 위에서 나고 죽어서
길이여 길이여 내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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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너바나나 2009/01/18 23:41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할 말이 없으시다고 거짓말을 하셨근영! 펼쳐보기까지 하니 무쟈게 할 말이 많으신 듯싶은디요 ㅎㅎ
    예전에 이 소설을 바탕으로 장선우가 맹근 영화는 봤는디 소설은 아직 볼 생각을 못 했구만요. 영화는 그래도 잼나게 봤는디..

    • 하민혁 2009/01/19 04:53  편집/삭제  댓글 주소

      저는 영화는 좀 그렇더라구요 제멋대로 상상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겠지만 소설로 읽으면 선재 동자의 궤적을 내 상상껏 그려갈 수 있는데 반해서 영화는 너무 전형적이어서요 선재동자도 내가 생각하는 동자가 아니고 무엇보다 소설에서 그려주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영화가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영화 <더 폴> http://blog.minjoo.com/385 의 미학이 동원된다 해도 가능하지 않을 듯싶어서입니다 우리 얼라(요즘 가끔씩 삽화 그려주는)한테도 그래서 가능하면 만화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보라고 합니다 힘이 되는 글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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