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니다. 이건 과거에 내가 미국으로 떠나지 못한 데 대한 후회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 꿈속에서만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에 대한 막연한 향수일 뿐이다.

막상 실현되어 우리의 손 안에 들어오면 그것은 우리가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것일 따름이다.

내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미국이 아닌지도 모른다. 미국은 내 불안의 한 구실에 불과한 것일른지도 모르며, 우리의 동경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나서 실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은 일일른지도 모르겠다.


1.
25시. 인류의 모든 구제가 끝난 시간이라는 뜻이다.
설사 메시아가 다시 온다 하더라도 아무런 구제도 할 수 없는 시간, 이것은 최후의 시간이 아니다. 최후의 시간에서도 한 시간이나 더 지나버린 시간인 것이다. 이것이 서구 사회의 정확한 현재 시간이다.


1.
도대체 신에 대한 모독에서 비롯되지 않는 인간의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모든 기쁨이란 실로 신을 향한 모독에 지나지 않는 것을.


1.
수천 시간을 해저에서 지내야 하는 잠수함에는 대개 환기 시간을 알려주는 특별한 기계 장치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장비가 없었던 예전에는 잠수함에 흰토끼를 싣고 다녔다. 함내에 산소가 부족하면 토끼들이 먼저 죽기 때문인데, 흰토끼가 죽고나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시간은 대여섯 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토끼가 죽게 되면 그들은 필사적인 해면으로의 부상을 시도하든가 아니면 권총으로 서로를 쏘아서 옥쇄하는 길을 택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길만이 주어진다.

현대사회는 지금 호흡 곤란증에 빠져 있다.
관료주의 군대 정부 국가조직 행정부 등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질식할 운명에 놓여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잠수함의 흰토끼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아직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흰토끼가 죽고 나면 그들이 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6시간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끔찍한 괴로움을 겪으며 죽어가는 인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단 흰토끼가 죽고 나면 해피엔딩이란 있을 수 없다.


1.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명예와 자존심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런 인간의 삶이란 노예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긍지를 가지고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오늘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현대사회는 개인의 명예와 의지, 다시말해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 가능한 것은 다만 노예로서의 생활뿐이지만 그나마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노예인 사회는 결국 멸망하기 마련이다.


1.
서구 문명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 사람들이 세워둔 전통이다. 둘째는 법 질서에 대한 존중이고, 이건 로마 사람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셋째는 인간 존중에 관한 사상이다. 이건 기독교인이 확립해 놓은 특성이다.

미와 법과 인간에 대한 존중, 서구 문명은 바로 이 세 가지의 특성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이제 유감스럽게도 서구 문명은 이 세 가지 유산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는 한 서구 문명은 존속할 수가 없다.
 
지금 서구 문명이 처해 있는 시간이 바로 "25시"이다.


1.
인간이란 결국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은 좀더 착하고 어떤 사람은 좀더 고약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양면을 많건 적건 동시에 지니고 있기 마련인 것이다.


1.
인간의 공포에는 한계가 있고 모든 슬픔에는 종말이 있다. 오래 슬퍼할 시간이 어디에 있으랴.
- 엘리엇 {25시}에서 재인용


1.
모든 사람이 그를 짓밟으려 한다.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마치 그가 살아 있으면 세계가 멸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면 온 세상이 퇴보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그를 죽이지 못해 기를 쓰고 있다.

그는 지상의 모든 악에 책임이 있다.
지금 지상의 모든 죄는 요한 모리츠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1.
앞으로 나는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나 구경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증인으로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서구의 기술사회는 인간에게 관중석밖에는 내주지 않는다.


1.
트라이언은 첫번째 총성을 들었다. 이어 두번째 총성이 울렸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온 몸이 나른해졌다. 마치 한 겨울에 독한 술을 마시고 후끈한 방에 앉았을 때처럼 옴몸이 노곤해졌다. 따듯한 액체가 손등을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의 몸은 철조망 아래의 찌는 듯한 대지 위에 무너져 내렸다. 옷걸이에서 미끄러져 내려앉은 외투와 같은 모습이었다.

트라이언은 맥없이 땅위에 쓰러진 자신의 육체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이 육체야말로 자기의 절친한 벗이 아니었던가? 이제야 자기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다음에는 그 육체에 견줄 만큼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와 아버지를 생각했다. 노라와 어머니, 요한 모리츠와 다미안 검사의 얼굴이 눈앞에 잠시 떠올랐다가, 박혀 있던 못을 뽑으면 그만 싱겁게 떨어져 버리는 액자처럼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함께 트라이언의 육체도 겹겹이 포개져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의식은 그 영상을 간직할 힘이 없었다. 기운이 모두 빠져버렸다. 잠시동안이나마 곧추세울 수 있었던 마지막 부분은 머리였다. 이마는 아직 지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몇 분 후에는 머리마저 가눌 기운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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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나가다 2009/02/04 19:55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서구 문명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 사람들이 세워둔 전통이다. 둘째는 법 질서에 대한 존중이고, 이건 로마 사람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셋째는 인간 존중에 관한 사상이다. 이건 기독교인이 확립해 놓은 특성이다.

    미와 법과 인간에 대한 존중, 서구 문명은 바로 이 세 가지의 특성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이제 유감스럽게도 서구 문명은 이 세 가지 유산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는 한 서구 문명은 존속할 수가 없다.

    /



    무슨 용도로 쓴 글인진 모르겠는데요. 이건 어디서 따온건가요 아니면, 직접 정말 이렇게 생각해서 쓰신건지요.

    서구 문명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미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압과 폭력을 위선적인 가면을 썼다는건, 이를테면 유럽인이라는 그어떤 자각도 없던 유럽인들은 그 뿌리가 부족했던 탓으로 소아시사의 승리자 그룹에 속해있던 그리스 역사를 자신의 뿌리인양 포장해요. 그리스랑 유럽은 상관이 없네요^^ 법질서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잔학한 사회적 역사적 폭압은 그 시초가 로마때 부터 였던 모양이죠? 전형적으로 타자화의 신화를 배태하는 그들의 방식, 자기네들의 방패막이 되어준 동로마제국을 유럽의 역사에서 거세한 이유는 그들이 결과적으로 이슬람세력에게 패망했기 때문이기도하고, 그들이 무시했던 러시아의 주류 세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기도 해요.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쌓아놓은 상식 밖의 폭력은 지난 2000년간 전인류가 극복하기 위해 모진 애를 써온 문제였네요. 정말 저렇게 생각하신다면 부디 불필요한 문장은 배제하고 공부를 하세요. 팩트는 그런데 없습니다. 21세기에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슬플뿐...

    • 하민혁 2009/02/05 16:36  편집/삭제  댓글 주소

      타이틀은 안 보시나 봅니다. 타이틀에 적혀 있잖아요.

      <책갈피> 게오르규의 <25시>중에서

      라구요. 그나저나 다행입니다. 저 분 20세기에 저렇게 생각했던 거니까요.
      그러니 넘 슬퍼하지 마세요. 슬퍼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

    • 서울시민 2009/02/05 16:47  편집/삭제  댓글 주소

      하하하~
      덕분에 뒤집어졌습니다. 괜찮아요. 남한테 초면에 공부해라 어쩌고 하며 건방떨 만큼 천재이신데 까짓 글제목 못 읽는 것 쯤이야 대수인가요. 계속 그렇게 사십시오. 이건 뭐...
      하하하~

  4. 섹시고니 2009/08/25 16:1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25시 25년전 쯤에 읽었던 것 같은데... 거의 기억이 ㅎ / 올만입니다. ㅎ

    • 하민혁 2009/08/25 16:20  편집/삭제  댓글 주소

      이게 뉘신가요? 반갑습니다 : )

      <덧> 오늘 이영애씨 결혼 기사가 인터넷을 뒤흔들던데.. 거기 보면 10년 열애라는 말에.. 그렇다면 28살 때부터 사귀었더란 말인가? 하는 댓글들이 유독 많더라구요. 25시를 25년 전에 읽으셨으면.. 계산이 안 나온다는.. ^^

      <덧2> 근데.. 몇 년만에 들오시면서 25시를 타고 들오시다니..?

  5. ㅈㄹ옆차기중 2009/08/26 13:2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옹...책을 너무 읽어서 잘못된 표본같은 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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