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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뒷북인가?

이 글은 원래 묻혀야 했을 글이다. 이미 타이밍을 놓친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자 <동아일보> 사설의 '언론사 길들이기'라는 말이 다시 눈에 밟혔다.

대통령의 '반성' 이후 날이면 날마다 재탕 삼탕으로 그 빛나는 승전보를 우려먹는 언론 방송의 행태에 밥맛이던 차였고, '언론단 신설'과 '방송법 제정' 등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자기 방어와 자기 이익 챙기기를 보는 일에 더욱 맛이 가 있던 차였다. 제쳐두었던 어설픈 글발을 다시 올리기로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발생한 몇몇 사안에 대처하는 정부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언론의 지적은 옳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고언에도 공감해마지 않는다. 원론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얘기들이다.

민심에 귀기울여 바른 정치를 하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신문 방송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개운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다. 너무 호들갑스럽고 너무 과대 포장하는 인상이다. 대통령 당선과 더불어 그리고 그 이후 상당 기간 '신용비어천가' 부르기를 마다 않던 신문 방송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모든 사안에 침소봉대로 일관하는 저들의 행태에 행여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인가?

불협화음과 시행착오

현 정부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룬 정부다. 몇 번의 정권 교체기를 거쳤다고는 하나,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의 정권 아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기간 특정한 세력의 손아귀에 있던 권부가 바뀌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은 하나의 집단에서도 책임자가 바뀌는 경우에는 불협화음과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것이 한 국가인 경우에야, 그리고 그런 경험이 전무한 마당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기왕의 기득권 세력에 의한 상당한 저항과 초보 운전을 해야 하는 권부의 미숙함이 있게 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상당한 불협화음과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익히 듣보아 온 터다. 권부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구안기부의 업무를 인계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매 사안마다 시종일관 '공작'임을 주장하며 딴지를 걸고 나서는 거대 야당의 필사적인 저항, 국민연금제도 시행이나 한일간 어업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현 정부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대처에 이르기까지 숱한 불협화음과 시행착오를 봐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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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공기(公器)임을 자처하는 언론이 취해야 할 길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각 사안마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차분한 대안의 제시여야 할 것이다. 다시말해 사안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달려들어 선동적으로 까발리는 방식이 아닌, 사태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냉철한 파악이어야 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언론 매체에서 이런 방식의 대응 자세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오히려 떠도는 루머에 온갖 개연성을 엮어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내기에 바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예컨대 최근 언론은 고관집 절도, 고급옷 로비, 검찰 파업유도, 김태정 유임, 손숙 격려금 수수 등과 같은 사안들을 들어, 이것이 현 정권이 도덕성을 상실한 결과라면서 연일 질타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현 정권의 도덕성 탓만으로 돌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각론상으로야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고 일단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일이겠다. 하지만 총론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문제의 본질은 결코 거기에 있지 않다. 그것은 현 정부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해소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문제가 아닌 때문이다.

마녀사냥과 대통령의 반성

더욱이 현 정부 들어 지난 1년여 동안 이 나라의 최우선 과제는 IMF의 구제금융 체제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전의 구악(舊惡)에 충분한 힘을 쏟을 여력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 아니던가? 그런 정부에다 대고는 국가 경제의 위기를 벗어나면서 동시에 이전의 모든 사회악에서 왜 자유롭지 못하느냐며 정권의 도덕성을 운운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지만 신문과 방송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정권의 도덕성과 연관시키기에 주저함이 없으며, 이는 결국 여론에 귀기울이지 않는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에 문제가 있다는 논리로 대통령의 반성을 촉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여론을 따르겠다는 대통령의 '반성'이다. 

문제의 근인(近因)이야 현 정권의 어설픈 정국 운영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들어 여론몰이를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는 관료들의 도덕성에 대한 각성이나 오랫동안 이어져온 구악(舊惡)의 척결이 이뤄질 수 없다. 그것은 사태의 해결보다는 오히려 일시적인 미봉책만을 요구하고 기회주의자만을 양산하는, 혹은 혼탁한 사회 상황을 연출하여 사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드는 그런 결과만을 낳게 할 뿐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근본이 되는 원인(遠因)까지를 찾아 그것을 밝혀야 한다. 지금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정권만을 탓하는 것은, 그리하여 결국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방식은 결과적으로는 대통령 일인 체제로 정국을 운영하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고 이 나라를 다시 비민주적인 총통 체제로 돌리라는 주문에 다름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해결은 언론에서 주장하듯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서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혁신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언론은 그러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분석은 외면한 채 온갖 추측과 재단으로 여론 만들기에만 열심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외환위기를 초래한 장본인들 곧 이전의 기득권 세력과 상업주의에 함몰되어 사회적 공기로서의 사명 따위는 내던져 버린 선동가로서의 언론을 만나게 되며, 대통령의 '마녀사냥' 발언에서 '반성'에 이르기까지 언론이 보여준 일련의 태도란 기득권 세력과 연합한 상업주의 언론의 정부와 '맞짱뜨기' 혹은 '대통령 길들이기'가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된다.

누구에 의한 여론인가?

언론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은 말한다. 초창기에는 그렇게 잘 나가던, 그 인기 좋던 정권이 지금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철저히 반성하라고. 그러면서 언론과 방송은 이런 모든 사태가 자신들이 전하는 민심과 여론을 수렴하지 않은 탓에 빚어진 일이라며 몰아 부친다. 거의 모든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여 들끓는 민심과 여론을 전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둔하고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들끓는다는 민심과 여론을 실생활에서 듣보기란 쉽지 않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일상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인 걸로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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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체 신문과 방송에서 저렇게 떠들어대는 민심과 여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여론의 정체는 무엇인가?

도대체 그 여론은 누가 만들어내고 누가 전파하는 것인가? 그 여론이란 행여 철저하게 그들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된 것은 아니었던가?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여론에 얼만큼이나 근접해 있는 것인가? 그들이 대통령의 여론 수렴과정에 문제가 있다면서 지적해마지 않는 여론 조사의 허구성이란 기실 그들에게 더 유효한 것일 수 있지는 않는가? 

이미 실기(失機)한 사안이기도 한 터이므로 두 가지 경우만을 예로 들어 보겠다. 먼저 대통령의 해외 순방 기간 동안에 있었던 옷로비 의혹을 다루는 언론 방송의 태도이다. 그들은 우선 이 사안이 국민을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런 다음 대통령의 해외 방문과 관련한 내용은 뒤로 한 채 연일을 두고 말 그대로의 '의혹'과 추측 기사들로 거의 모든 지면과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이런 언론과 방송의 태도는 손숙 환경부 장관의 격려금 수수 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안들이 과연 그토록이나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야 할만큼의 중차대한 사안들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겠지만 당시에는 그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사안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그들의 보도 자세는 과연 냉정하고 객관적인 것이었는가? 이것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옷로비 사건은 온통 추측들로만 이뤄진 짜맞추기식 이야기가 판을 쳤고, 격려금 수수 건은 억지 춘향식의 논리로 일관한 것이었다.

언론과 방송의 뉴스 만들기

신문과 방송의 이같은 태도를 일부에서는 '언론의 집단적인 보복'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개각 과정에서 정부가 특정 언론사에만 입각 예정자 명단을 흘렸고, 여기에 반감을 가지고 기회를 엿보던 언론이 집단적으로 들고 일어난 결과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역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상업주의와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언론 방송의 뉴스 만들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동아일보 사설 확 달라졌습니다

요즘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는 '동아일보 사설을 읽지 않고는 화제에 낄 수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동아 사설은 어떤 성역도 없이 할 말을 제대로 하기 때문에 속이 시원하다고들 합니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마치 통나무를 쪼갤 때, 도끼를 들어 결대로 조각내듯이, 있는 사실을 결에 따라 조리있게 분석하고 문제점을 들추어 냅니다. 권력이건 금력이건 가리지 않고 동아일보의 사설은 그 문제점을 과감히 파헤치고 비판해 나갑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시시비비(是是非非)
언론의 사명입니다 - 창간 79주년 동아일보



마이다스 동아일보의 '사설' 코너 꼭대기에 걸려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우리의 여러 의문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먼저 언론이 그렇게 추앙해마지 않는 '오피니언 리더'의 정체성과 관련해서다.

위의 글에 따르면,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오피니언 리더'란 언론을 통하지 않고는, 다시말해 언론에서 제공해주는 해설을 통하지 않고는 '화제에 끼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곧 이 글의 맥락에서 드러나는 '오피니언 리더'는 사태를 보는 자신의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한 채, 기껏 언론 매체의 주의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 종사할 뿐인 이들인 것이다. 

여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요즘 부쩍 많이 듣보게 되는 말 가운데, 네티즌 의견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네티즌이란 기실 누구를 일컫는 것인가?

통신을 이용하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해본 사람이라면 쉬이 동의할 수 있겠듯이 그들 대부분은 아직 충분한 비판 능력을 가진 이들이 아니다. 철저하게 미디어 세대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어떤 사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보다는 순간적인 감성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그들의 주의 주장이란 것도 기실 각종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것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신문 방송의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경향성이 이러한 네티즌의 감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며, 아울러 네티즌의 이야기가 언론 매체의 주의주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어딘가에서 많이 듣본 이야기들이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은 이들의 주장들까지도 여과없이 민심과 여론으로 기꺼이 원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최근 모든 언론 매체에서 활용하고 있는 옴부즈맨이라는 피드백 장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옴부즈맨이라는 이들은 언제나 정해져 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란 하나같이 해당 매체의 주장을 완곡하게 대변하는 데 머물러 있다. 사소한 몇 가지를 지적하는 듯 하면서도 기실 핵심적인 이야기에 이르면 결국은 언론의 주의 주장을 그대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기사 해당 매체의 논조와 심히 다른 글이라면 어떻게 거기에 함께 실릴 수 있을 것인가?

인터넷시대의 언론매체는 네티즌 독자와의 영합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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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위의 글이 시사하는 바는 언론이 철저하게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은 뭔가 시원한 말을 듣고 싶어하고, 언론은 바로 대중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매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이 글은 보여준다.

최근의 각 언론 매체는 독자 및 시청자 끌어안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거의 매일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는 것은 신문 지국의 종사자들이고 날이면 날마다 경품 축제를 벌이고 있는 곳은 방송과 신문 인터넷 사이트들이다. 새로운 디지털 문명 세기로의 전환을 앞두고 기왕의 언론 매체에 대한 위기론이 대두되는가 하면 일순간에 채널을 바꾸어버리는 리모콘 타임이 지배하는 현 상황 앞에서 독자나 시청자를 확보하지 못하는 신문이나 방송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 매체가 독자나 시청자를 붙잡기 위해 취하고 있는 방식은 바로 위의 '선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선명성이다. 선명성 경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선명성 경쟁이 인지도를 높이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일 수 있는, 그러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선정성과 선동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그리하여 대안없는 폭로성으로 일관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언론의 자유라 일컫는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 '죽이기'로 나가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사회, 리스트 정치, 폭로 정치가 일상화되어버린 사회 현상들이란 어쩌면 언론과 방송에서 앞서 부추긴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급옷 로비 사건'과 관련하여 대통령이 여론을 언급하자, 거의 모든 언론 매체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여론 조사가 얼마나 허구적인 건지를 밝히는 온갖 자료들로 도배를 하면서 대통령의 언급에 제동을 걸었다. 앞서 예로 든 네티즌과 옴부즈맨이 총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의견을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론을 조작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그것이 독재 체제가 아닌 한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언론은 얼마든지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하고싶은 이야기란 단적으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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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길들이기'와 '대통령 길들이기'


대통령의 '마녀 사냥' 발언에서 시작하여 대통령의 '반성'으로 끝이 난 여론 게임에서 언론은 철저하게 여론 만들기로 일관하였고 그리고 지금 그 성공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여론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의견을 좇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최선인 것은 아니다. 이는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 다수라는 것이, 그 다수의 생각이라는 것이 결국 누구에 의해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인가에 주목하게 되면 대중정치의 강조를 외치는 언론의 행태에는 마땅히 의혹과 경계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거의 반 세기 이전에 마르쿠제는 자신의 주체적 관점을 잃은 채 대중에 함몰되고 마는 '일차원적 인간'을 언급한 적이 있고 그보다 더 이전에 오웰은 '1984년'과 '동물농장'으로 여론몰이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린 바 있다. 저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 주체가 되는 거대 권력이란 이제 더 이상 마르쿠제나 오웰이 가리키고 있는 바의 정부가 아니다. 오늘날의 거대 권력이란 바로 여론을 만들고 그것을 전파하는 언론 매체는 아니겠는가?

이번에 그 실체를 드러낸 대통령과 언론의 패권 다툼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옷 로비 의혹 사건이 그토록 대단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중대사안이었다고 여기지 않으며, 그 사안으로 인해 그들이 단정하는 바, 모든 국민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듯이도 보이지 않는 때문이다. 서민들의 반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거기에도 실은 언론이 깊이 관여한 바가 적지 않은 탓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요즘 언론과 방송을 통해 가장 흔히 듣볼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언론 길들이기'라는 말이다. 방송법 제정을 통해 대통령이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면서 신문과 방송에서 주조해낸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언론이 여론을 빙자하여 혹은 여론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대통령 길들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할 것이다. 

대중정치를 위하여

민주 사회의 정치란 원칙적으로 여론에 입각해 이뤄져야 한다. 이런 원칙론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중세의 마녀사냥에서 보듯이, 불순한 의도에서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여론이란 문제의 초점을 흐리고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측면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여론의 정체에 대해 주목하고 경계해마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그것이 바로 최근에 벌어진 대통령과 언론의 여론 게임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유다.

여론에 의한 정치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론을 형성하고 전하는 과정에 신뢰가 담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언론 매체에 의해 거론된 여론이란 신뢰성보다는 상업성에 우선하여 만들어지고 전파된 것이었으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대중과 영합한 사이비 여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언론 매체가 비단 금권과 권력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상업주의에 바탕을 둔 독자, 시청자와의 영합에서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올바른 여론을 위해서는, 건전한 언론 매체를 위해서는 그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때문이다.  <199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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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너바나나 2009/02/20 22:43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뒷북이면 좋겠는디 아니라서 문제구만요. 몇년 전 얘기를 가져와도 그대로 대입이 가능하니 이거야 원..

    불편부당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사실이나마 왜곡하지 않고 지들 하고 싶은 말을 했으면 좋겠구만요.

    • 하민혁 2009/02/21 00:09  편집/삭제  댓글 주소

      이번 티엔엠 건도 그렇고 언론 건도 그렇고 미디어 일반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물론 이건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언론의 경우는 특히 이게 해소될 기미가 별로 안 보이는 게 서로 데칼코마니로 닮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하면 우리는 세계적인 언론을 만들어갈 환경은 두루 갖추고 있거든요. 근데 이게 적대적 공생관계가 워낙 견고하다보니까 도대체 다른 대안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왜곡을 잘 하면 더 칭송받는 게 우리나라 언론의 현실입니다. 언제고 제가 이걸 함 실증으로 보여드리려 합니다.

  4. 머니야 2009/02/20 23:09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저는 조중동은 광고매체집행외에는 볼일이 없다는..ㅋㅋ..간혹 인맥으로 보라고 해도..나중에 신문값안주면..다 끊어 주고...착하던데요..^^ (사실..저는 시사관련 글보면..눈알이 쓰려서 헛소리만 찌그리고 갑니다...지송..ㅠㅠ)

    • 하민혁 2009/02/21 00:19  편집/삭제  댓글 주소

      광고 하면 조선일보지요. 요즘이야 잘 모르겠지만, 조선일보에서 한번 다루어지면 그 업체는 일단 대박 나는 걸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저도 시사 관련해서는 잘 모릅니다. 다만, 언론 쪽에는 관심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뚜드러맞는 경우가 있는 것같구요. 이를테면, 그게 시사 문제지 왜 언론의 문제냐면서 말이지요. ^^

      <덧> 진보 보수 이런 '틀' 얘기하는 애들치고 진보나 보수인 애 못 봤습니다. 늘 하는 얘기지만, 진보든 보수든 그거 주디로 떠들고 다니는 애들 대부분은 진보나 보수가 뭐 말라비틀어진 건지 모릅니다. 그저 그 '외피'가 필요한 애들일 뿐이지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실제로 하는 짓을 봐도 그렇구요.
      (같은 말이라도 말을 이렇게 싸가지 없이 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머리로는 익히 알고 있는데.. 말은 꼭 이런 식으로 손꾸락을 타고 내립니다. 쩝~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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