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표 화염병이 태워버린 '개미'의 꿈
기획/ 개혁국민정당, 그 1년의 비망록

/ ⓒ 디지털말 박권일


개혁당 창당의 주역인 유시민씨는 작년 9월 17일 “1백 년 갈 정당을 만들겠다”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2004년 총선 때는 제1당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2003년 12월 현재, ‘1백년 갈 정당’은 1년도 안 돼 빈사상태다. 인터넷 정당을 표방한 개혁당 사이트의 ‘대문글’은 11월 내내 방치되어 오다 12월 8일에서야 바뀌었다.

한 달여 만에 바뀐 대문글 제목은 ‘개혁당 홈페이지가 정상화되고 있습니다’였다. ‘정상화’되다니? 그럼 그동안 ‘파행’으로 운영되어 왔다는 말인가.

이미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었듯, 개혁당은 지난 10월 말 ‘마지막’ 당원투표를 통해 사실상의 해산을 결정했었다. 많은 당원들이 통합신당, 즉 열린우리당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개혁당의 묵은 갈등들이 살을 찢고 올라왔다. 심지어 ‘떠난 당원들’과 ‘남은 당원들’ 사이에서 법적 분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당의 상황을 좀더 단순히 표현하자면, 현재 개혁당은 정치적으로 사망상태이고, 법적으로는 생존해 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러나 최근 사태를 자세히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그간 개혁당의 역사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개혁당의 문제는 갑자기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1년 동안 천천히 쌓여온 과정들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화염병 들고 바리케이드 앞으로”


2002년 8월 초, 정치평론가였던 유시민씨가 난데없이 절필선언을 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반칙을 하는데도 심판이 제지하지 않는 불공정한 게임이 지속되고 있다. 국민후보로 뽑힌 노무현을 민주당 비노·반노그룹이 아무런 이유없이 낙마시키려 하고 있다.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절박한 심정이다.”

대선이 치러지기 넉 달 전인 당시를 되돌아보자.

광화문을 ‘붉은 물결’로 가득 채웠던 월드컵 기간이 끝나고, 한국 축구의 ‘4강신화’에 대한 뒷이야기들이 무성하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월드컵 뒤풀이 기간이다. TV를 켜면 아직도 축구 국가대표선수들의 얼굴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었지만 ‘축제’도 이젠 끝물. 국민들은 서서히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해 봄을 뜨겁게 달궜던 ‘노무현 돌풍’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아니, 노무현 최대의 위기상황이라 해도 좋을 만큼 친노진영의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노무현 당시 후보 입장에서는 악재가 한꺼번에 터져나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였다.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이른바 ‘YS 시계사건’이다. 노무현 후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예전에 그에게 받은 시계를 보여주며 ‘굽신’거렸음에도 불구, 결국 지지표명을 듣지 못했다.

이 사건은 ‘범개혁세력’에게 노무현에 대한 실망감만 안겨줬다. 반면 보수언론들은 ‘DJ양자론’을 들고 나오며 연일 노무현 후보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DJ의 햇볕정책을 비판한 것도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DJ를 비판해도 욕먹고, 옹호해도 욕먹는 갑갑한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

한때 60%에 달했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절반이나 깎였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의 한화갑 대표는 지지도 하락을 이유로 노무현 후보사퇴를 언급하기까지 했다.

유시민씨가 정치평론가라는 ‘심판’을 때려치우고 직접 ‘선수’로 뛰겠다고 나선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노무현이 표방하는 가치, 그가 체현하는 문화가 우리가 지향하는 시대의 흐름과 부합”하며 그렇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노무현을 구하는 것이 곧 정치개혁”이라는 논리였다.

8월 8일 원주 노사모 초청강연에서 유시민씨는 “노무현 선거본부에 참여할 생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행동은 한 정치평론가의 ‘시민선언’ 혹은 ‘노무현 지지선언’에 불과했다.

‘폭탄선언’은 8월 27일 한 인터넷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개미들, 노무현과 인터넷으로 정치 입문


유시민씨는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신당을 만들어 민주세력의 총결집에 나설 것”이라면서 “(그 신당은) 反부패·국민통합형·참여민주주의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미래형 정당이며 가칭 ‘정치혁명과 국민통합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10만명의 발기인을 모집할 계획이라고 부연했다.

유시민씨의 이 야심찬 창당선언에서 주목할 ‘키워드’는 ‘노무현’과 ‘인터넷’이었다. 국민통합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말들은 이미 기성정당들도 다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만 새로운 것은 ‘노무현’과 ‘인터넷’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 아래에는 며칠간 3천1백15개의 독자의견이 달렸다. 유례없이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유시민씨와 처음부터 호흡을 맞춘 창당실무기획단은 이용철 변호사, 유기홍 희망네트워크 실행위원장 등 30여 명이었다.

이들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8월 29일에는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 제안 국민토론회’를 개최하고, 30일에는 개혁당 사이트를 띄워 창당발기인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9월 17일에는 63빌딩에서 약 1천5백 명이 모여 추진위원회를 공식 발족했다.

‘실패할 것’이라는 세간의 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명을 채 만들기도 전에 개혁당의 발기인은 2만1천여 명을 넘어섰다.

약 3주 만에 민주노동당의 당시 당원 수를 가볍게 뛰어넘은 것이다. 물론 인터넷이기에 가능한 숫자였다.

이윽고 11월 16일 개혁국민정당은 정식으로 창당식을 하고 당대표로 유시민씨를 선임한다. 창당 당시 당원 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합쳐 3만2천 명이었다.

그리고 ‘개미들의 유쾌한 정치반란’ ‘고래를 삼킨 새우’ 등이 개혁당의 캐치프레이즈로 결정되었다.

얼마 후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이 입당함으로써 개혁당은 당당히 의석보유 정당이 되었다.

대선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노무현과 노사모, 그리고 개혁당은 인터넷과 만나 이 나라 정치구도를 일거에 뒤엎을 듯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개혁’의 열망은 강렬했고, 개혁의 상징적 인물 또한 명확해 보였다.

개혁당은 당원투표 결과 ‘타당 후보’인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안에 무려 94%가 찬성표를 던졌다. 그래서인지 창당 당시부터 개혁당이 뚜렷한 정책이나 이념없이 노무현이라는 인물에만 치중하는 것을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김대영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2002년 10월, 『한겨레21』의 기고를 통해 개혁국민정당의 사당적 성격을 지적했다.

“국민통합21은 정몽준 사당이고 개혁국민정당은 노무현 사당이다. 한나라당은 97년 대선에서 공당(公黨)이 되었고 민주당 역시 공당이 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출발부터 공당인 민주노동당은 점차 국민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대선승리의 주역 개혁당


2002년 12월 19일, 드라마틱한 반전 끝에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했다.

대선 전날 밤, 정몽준씨의 공조파기선언이 알려지자,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개혁당도 발칵 뒤집어졌다. 거의 ‘공황’상태에 빠진 노사모 회원들과 개혁당원들이 곧장 민주노동당 사이트로 몰려들었다. 이회창 후보 당선을 막기 위해 노무현 후보를 찍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노사모 회원이자 당시 개혁당원이기도 한 문성근씨는 “민노당 지지자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민노당의 정신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사태부터 막아야 합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보입니다”라며 간절히 읍소하기도 했다.

개혁당원들과 노사모의 읍소로 인해 민노당의 표가 얼마나 노무현 후보에게 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민노당은 예상보다 미흡한 3.9%의 득표에 만족해야 했다.

한편 노무현 당선이 거의 확정된 후, 유시민 개혁당 대표는 의기양양하게 소감을 털어놓은 바 있다.

“아주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민노당의 표는 (노 후보 당선에) 그리 영향력이 없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5억 원 내고 얻을 것은 다 얻었는데 마지막에 던지지 못했다.”

개혁당 대표의 저 말을 두고 아직까지도 상당수 민노당원들이 “결코 잊지 못할 망언”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감동과 열정이 뒤엉킨, 극적인 승리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산모가 노사모라면, 개혁당은 난산을 막아낸 산파였다.

당연히 노무현의 개혁당을 향한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선이 확정되자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사 다음으로 찾은 곳은 여의도 대하빌딩 4층, 바로 개혁당 사무실이었다.

노무현 당시 후보는 “당원동지 여러분 수고하셨다. 이제 6월 항쟁 세대들이 역사에 대한 주도권을 주장하고 나섰다고 생각한다"며 개혁당원들과 함께 샴페인을 터뜨렸다.

이렇듯 개혁국민정당은 창당 한 달 만에 ‘대통령을 만든 정당’이 되었다. 물론 노무현은 형식상으로는 민주당에 적을 둔 ‘민주당의 후보’였다. 하지만 개혁당이 노무현의 ‘친정집’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또한 틈날 때마다 개혁당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향후 정계개편은 개혁당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섣부른’ 관측도 튀어나왔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2003년, 개혁당의 내우외환이 시작되다


“2003년 벽두부터 개혁당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건이 김원웅 의원 당대표 호선 문제였다.”

여주에서 법무사로 일하고 있는 전 개혁당원 김이준태씨는 “거의 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불길한 징조였다”고 말한다.

지난 1월 20일, 개혁당 대표로 김원웅 의원이 호선되었다. 유시민씨는 4월 재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대표직을 내놓았고, 김원웅 의원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를 뽑은 것은 평당원들이 아니라 전국집행위원회라는 소수의 ‘지도부’였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개미들의 정치를 표방했지만 개혁당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실상 전국집행위원회였다. 당과 관련한 주요 사안은 모두 전국집행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 김원웅 대표 선출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당의 리더를 뽑는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개미들은 그 논의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김원웅 대표의 한나라당 경력 따위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절차적 민주성이 훼손된 게 문제였던 것이다. 원칙에 충실한 당원들의 첫 번째 탈당 러시가 시작된 게 그때였다.”

이 문제는 당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대표 호선발표가 있기 전부터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갈등이 증폭되기만 했다.

호선이 발표된 다음 날인 1월 21일 당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제목은 ‘드디어 시작되는 당원들의 탈당 도미노 현상’이었다.

“가슴 아픈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이미 일부 당원들은 우리 당을 탈퇴하겠다고 하고 있으며 곧 도미노처럼 줄줄 탈퇴선언을 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누가 개혁과 한국 사회변혁의 꿈을 안은 이 젊은 동지들에게 피눈물을 나게 하고 있는가?” (작성자: 김민주)

‘어슴새벽'이라는 아이디의 당원은 대표호선이 발표된 날 올린 글에서 “어떻게 선출직 집행위원이 아닌 사람이 대표가 될 수 있나?”라고 분개했고,

박준명이라는 아이디의 당원은 “차라리 체육관 선거라도 되었으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겨우 5명의 집행위원이 명망가라면 당원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므로, 문제가 심각하다”라고 비판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한나라당 지도부의 대표 ‘직선’ 선출 소식이 알려지면서 기묘한 대비를 이루기도 했다.

이 문제는 결국 당원들의 ‘사후추인’을 받는 형태로 봉합되었으나 이미 상당수의 당원들이 탈당한 후였다. 하지만 그 일은 당내갈등의 시작일 뿐이었다.

두 달 뒤 4·24 재보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개혁당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대사건이 터지게 된다.


유시민의 민주당 연합공천이 준 충격


유시민씨는 당대표직을 내놓은 뒤, 4월 24일 재보궐선거에서 고양 덕양갑 지구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상태였다.

그런데 2월 중순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개혁당 유시민 후보가 민주당과 연합공천으로 출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 씨는 3월 10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민주당과의 공조는 결코 없을 것이라 못박았다.

“우리의 목표는 부패한 두 거대 정당의 지역분할 정치구조에 결정적인 균열을 내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않고도 국회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예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지형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려는 정당개혁, 정치혁명의 핵심이다. 나는 전략전술이 아니라 진정성과 열정으로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다.”

그런데 그 이전인 3월 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유시민씨는 “국민경선을 통한 단일 후보론이 공론화되었을 경우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제안을 해온다면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남겨, ‘명분 있는 연합공천’은 고려할 것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이 기사를 본 많은 개혁당원들이 ‘있지도 않은 거래’ 때문에 오해를 받고 있다면서 펄쩍 뛰었다. 홍민표라는 아이디의 당원은 3월 6일 당원게시판에 “이는 우리 당의 역량을 애초부터 무시하는 처사이며 참다운 개혁정당의 길을 가려는 우리 당원 모두에게 모욕”이라는 글을 남겼다.

보궐선거 직전까지 많은 당원들이 “보수세력과의 야합 절대불가”를 외치고 나섰지만 결국, “설마설마하던 개혁당-민주당 공조”는 현실로 드러났다.

유시민씨는 후보등록을 사흘 앞둔 시점인 4월 4일 ‘본심’을 당원들에게 털어놓게 된다.

“지난주 민주당과 선거공조 찬반투표에서 나는 찬성표를 던졌다. 지금 개혁당과 민주당의 선거공조에 대해 누가 돌을 던지고 있는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공격하고 모욕하고 비방했던 세력이다. 민주당 내 반칙세력, 한나라당, 그리고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선거공조를 비난하는 사설까지 썼다. 이런 세력이 입을 모아 반대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소위 ‘보수세력’이 반대하는 일이니까 일정부분 정당성을 가진다는 논리였다.

김이준태씨는 ‘이때 당내 갈등이 극에 달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연합공천 반대를 주도했다. 연합공천이 추진되면 내가 당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당원투표에서 연합공천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6:4로 나왔다. 결국 유시민씨는 민주당과 연합공천을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는 탈당했다.”

유시민 연합공천이 당내에 준 충격파는 어마어마했다.

웹프로그래머인 개혁당원 박진철씨는 이 사건이 개혁당에 결정타였다고 회고한다.

“독자후보로 나간다고 말하다가 결국 유시민씨가 당원들의 뒤통수를 때린 격이었다.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급격히 커졌고, 가장 많은 수의 당원이 그때 혹은 이후 몇 달 사이 탈당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개혁당의 원내진출과 독자생존의 불투명성을 들어 민주당과의 공조를 찬성하는 입장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정치권의 신당논의가 가시화되자 개혁당의 운명은 오리무중으로 빠져든다.


노무현과 개혁당, 신당의 함수관계


유시민 연합공천은 당내의 첨예한 문제였을 뿐 아니라 개혁당의 미래와 이후 탄생한 통합신당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란 주장도 있다.

개혁당의 전 집행위원이자 2003년 12월 현재 임시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오정례씨는 이렇게 말했다.

“유시민씨가 연합공천 후보로 나갔을 때 이미 신당 합류의 조짐이 있었다. 대선이 끝나자 이용철, 문성근씨 등 당내 핵심인자들이 개혁당에서 나갔고, 민주당 신당파가 5월 16일 신당추진모임을 결성하는 등 정치권은 신당 창당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재보궐선거가 끝나자 유시민씨와 강영추씨 등도 범개혁신당추진위원회를 만드는 등 발빠르게 보조를 맞췄다.”

하나의 시험관에 담긴 두 개의 새싹 중 하나가 급격히 성장하면 다른 하나는 양분을 빼앗겨 죽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신당론이 커지면 커질수록 개혁당은 쇠잔해져 갔다. 게다가 새만금, NEIS사태, 이라크 파병, 노동자·농민들의 잇따른 자살과 노정갈등 등을 처리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신당논의에만 골몰하는 개혁당 분위기에 실망해 탈당한 이들도 상당수였다.

예컨대 7월 1일, 당 게시판에 남긴 김민준씨의 ‘열 받아서 탈당합니다’라는 글을 보자.

“이번 철도파업에 대한 개혁당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 곳에서도 개혁당의 입장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노무현이 하는 일에 개혁당이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철도노동자로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던 내 자신이 미워진다. 그럼 열심히 신당이나 만드시길.”

개혁당 내 성폭력사건도 큰 타격이었다.(월간 『말』 2003년 4, 5월호 참조)

전 개혁당원 이아무씨는 “성폭력사건이 여러 번 터져나왔는데도 중앙당의 태도는 참으로 안이했다”고 꼬집으면서 “개혁당의 양성평등 당헌에 호감을 느껴 입당했지만, 개혁당은 여성당원들에게 환멸만을 안겨줬다”고 밝혔다.

신당 논의에 한창 불이 붙을 무렵 개혁당에서 소위 ‘끝장토론’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유시민 의원과 김영대 사무총장 등 지도부는 ‘총선용 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평당원 김표무씨 등은 ‘모델하우스 정당은 필요없다’면서 독자적 개혁당으로 총선에 임하자고 주장했다.

격론을 벌였지만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토론은 끝이 났다. 지도부와 일부 평당원 사이의 골만 확인한 셈이었다.

개혁당 의정부 지구당의 고도환씨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재보궐선거 때까지만 해도 4만 명 정도의 당원을 유지하다가 신당합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시민씨에게 비판적이거나 개혁당 독자생존을 주장하던 당원들은 다 탈당했다.
그 결과 소위 ‘유빠(유시민의 팬)’로 불리는 당원들이 다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당원 투표 결과가 항상 지도부의 의중대로 흘러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치권의 시계는 예정대로 돌아갔고, 10월이 되자 민주당 신주류, 한나라당 탈당파, 개혁당을 아우르는 ‘범개혁신당’의 실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개혁당의 개미들은 싫든 좋든 당의 운명을 걸고 ‘올인’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개미들의 마지막 투표


2003년 10월 27일, 드디어 개혁당의 운명을 가름하는 당원투표가 실시되었다.
11월 11일 창당될 통합신당(열린우리당)에 합류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안건: 우리 당은 신당에 전원 참여한다. 참여방법 및 전국당원대회 결과에 따른 법률적 절차 등은 전국상임위원회에 위임한다.

투표기간: 2003년 10월 27일(월)~31일(금)

총 유권자수: 7천2백64명

투표는 인터넷과 휴대폰 ARS로 치러졌다.

한편 참정연, e-ants 등 개혁당 내 평당원 모임에서 활동하는 당원들이 ‘전당원대회 투표에 임하는 개미당원 74인의 호소문’이라는 글을 통해 신당 합류 반대를 호소하기도 했다.

“유시민 등의 명망가들이 원칙과 명분을 저버리고 기성정당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신당에 ‘올인’하고 있으며 이는 개혁당의 창당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열린우리당은 우리가 원했던 당의 모습과는 멀어도 한참 먼 정당이며 그곳에 우리 개미들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더디 가더라도 우리의 길을 가자”

그러나 결과는 ‘신당참여’였다.
총 투표자 5천81명 중 찬성 3천9백62명(77.98%), 반대 9백55명(18.80%), 기권 1백64명(3.23%).

투표과정에서 김원웅 대표와 유시민 의원이 신당 합류방식을 놓고 약간의 시각차를 보이기도 했다.
유시민 의원은 “동호회를 할 것인가 정당을 할 것인가”라고 물은 뒤 “당 해체 후 개별 입당하자”고 했고, 김원웅 대표는 “소수의 당원이 신당에서 얼마나 체질을 바꿔낼지 비관적”이라며 ‘당 대 당 통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 대 당 통합은 개혁당의 현실을 볼 때 불가능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었다.

결국 개혁당 상임위윈회는 개별 탈당 후 열린우리당 입당이라는 방식으로 사실상 개혁당의 해산을 결정했다.

1백 년 가자던 개혁국민정당, 과연 창당 1년 만에 개미들의 혁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것인가.


당 잔류파의 역습: “개혁당 해산은 불법”


12월 2일 여의도 대성빌딩 903호. 위풍당당한 한나라당사 바로 뒤편이다.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낡은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오정례 전 개혁당 집행위원과 몇몇 개혁당원들을 만났다.

집기 하나 없이 텅 빈 좁은 오피스텔에서 이들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것도 개혁당이 열린우리당 합류를 결의한 마당에.

“대하빌딩에 있던 개혁당사가 이쪽으로 이사온 것이다. 개혁당은 아직 해산하지 않았다. 지도부가 불법적으로 결정한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정종국씨의 말이다. 이들은 현재 개혁당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이들은 개혁당의 구 집행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개혁당 잔류를 선언한 상태였다. 오정례 전 집행위원이 이들에 의해 당대표 권한대행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비대위측의 주장에 따르면 상임위원회의 개혁당 해산결정은 명백히 위법이라는 것이다. 오정례 대표는 중앙선관위의 판결을 근거로 내밀었다.

“선관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개혁당 해산의 절차적 문제점을 적시했다. 첫째, 당의 해산은 당원대회 의결사안이지 상임위와 같은 하위기관의 결정사항이 아니다. 둘째, 오프라인 당대회는 정족수 미달로 무효이다. 셋째, 온라인투표는 선거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무효이다.”

그는 또한 “이미 탈당한 집행부가 사무실 집기 등 당의 재산을 마음대로 가져갔기에 도난신고를 해놓은 상태다. 그들은 ‘당을 돌려달라’는 우리에게 심지어 당명을 바꾸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다”면서 법적 대응을 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오정례씨는 “무엇보다 신당이 전혀 ‘개혁적’이지 않다는 게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의 당규를 보고 개혁당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역구 출마후보자들의 30%를 당지도부가 경선 없이 지명한다는 내용이 버젓이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30%라면 현재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현역 국회의원들의 숫자와 일치한다. 수구기득권정당들의 지역구 나눠먹기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구 집행부측을 대변해 비대위측과 ‘협상’하는 사람은 개혁당 사무차장인 최은영씨다. 비대위의 표현에 따르면 그가 “터무니없는 협상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개혁당 당명과 인터넷 도메인을 바꾸고, 개혁당 데이터베이스 일부를 삭제하는 것을 전제로 비대위측에 당권 및 재산을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비대위측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12월 1일부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개혁당 해산을 둘러싼 진통이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정례씨는 12월 4일 오후 2시에 비대위측 당원 10여 명과 함께 열린우리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피켓시위를 벌였다. 개혁당원들은 “유시민, 김원웅은 개혁당의 재산을 돌려달라”며 구호를 외쳤다.

열린우리당으로 간 개혁당 당직자들의 눈에 이 풍경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비대위는 대표성 없는 모임일 뿐”


열린우리당사로 들어가려는데 경찰이 따라붙었다.

“어디 가시죠?”
“열린우리당 당직자를 취재하러 왔습니다.”
“당직자 이름이 뭐죠?”
“제가 왜 그걸 당신한테 신고해야 되는 건데요?”

경찰은 쏘아붙이는 말을 듣고 ‘찔끔’한 듯 했으나 엘리베이터를 따라 타면서까지 기자를 ‘감시’했다. 열린우리당 사무실로 들어가 취재원을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돌아섰다. 과연 대통령의 ‘정신적 여당’이라는 곳에 걸맞은 철통같은 보안이었다.

그곳에서 전 개혁당원이자 현 열린우리당 당직자로 일하고 있는 정동영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물 밖에서 개혁당원들이 시위하는 것을 보았냐고 묻자 그는 “봤다. 참 안타깝고 마음이 안 좋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정동영씨는 개혁당의 가장 초기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유시민, 문성근, 유기홍, 강영추 등 개혁당을 처음부터 기획한 이들과 ‘국민후보지키키’ 운동을 같이 했었다.

“개혁당에 대한 애정으로 따지자면 나도 남 못지않다. 그러나 지금 저렇게 시위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개혁당은 인터넷정당이었고, 의사결정도 인터넷으로 해왔다. 기존의 정당법으로 재단할 수는 없는데, 선관위 판결을 근거로 불법이라고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비대위측이 전 집행부와 대립하는 이유는 불법이냐 위법이냐 여부보다는 차라리 도덕성이나 개혁성 같은 ‘명분’에 방점이 더 찍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동영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의 열린우리당이 개혁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혁성에 대한 판단은 10월 말 당시, 다시 말해 우리가 신당 합류 투표를 했던 시점에서 판단되어야 할 문제다.
나는 열린우리당이 기존정당과 다르고, 앞으로도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혁당원들이 우리 당에 들어와서 같이 바꿔나가는 게 정도 아닌가.”

그는 덧붙여 “개혁당은 한국정치에서 꼭 필요할 때 등장했고, 꼭 필요할 때 해산했다”면서 “그간 개혁당의 시스템을 존중한다면 해산과정 역시 존중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현재까지 개혁당에 남아 해산업무를 보고 있는 최은영 사무차장은 비대위측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마치 자기들이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매도하는데, 당원투표로 결정된 사안을 거부하는 그들이야말로 정당성이 결여된 집단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누가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했느냐’면서 비대위측의 ‘대표성’을 문제삼았다.

“1백 명도 안 되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자기들끼리 오정례씨를 대표권한대행으로 선출하고 나한테 해임통보를 했다. 더구나 오정례씨는 당권이 정지된 상태라 대표자격도 없다.”

그는 또 비대위측에 당명·도메인명 변경요구 등을 한 것에 대해
“개혁당 이름과 도메인이 유지되면 신당으로 간 개혁당원들과 마찰만 생기고 좋을 게 없다. 그리고 당원자료가 들어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어떻게 함부로 내주나. 신당에 간 사람들 자료까지 그들이 갖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일축했다.


개혁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어떻게 보면 개혁당에 대한 성찰은 유시민 의원 개인이나 개혁당원만의 것이 아닌, 동시대인 모두의 몫일지 모른다.
개혁당의 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서강대 정외과 손호철 교수는 ‘개혁당 실험’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개혁당은 유시민씨의 재보궐선거가 보여줬듯이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국회의원을 만들었다. 민주당 경선보다 오히려 후퇴한 결과다. 인적 청산이 아닌 제도개혁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데 개혁을 표방하고 나선 당이 그걸 지키지 못했다. 어렵더라도 덕양갑선거에서 합동후보경선을 했어야 한다.
유시민씨가 국회의원 배지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개혁당의 의미 있는 실험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칼럼니스트 홍기빈씨는 개혁당의 역사적 의미가 ‘전반적 사회개혁의 시작점으로서 정치개혁을 바라보는 집단의 출현’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개혁당의 중추를 이루는 사람들은 ‘386’이며 이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가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는 의식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자니 ‘개미’들로서는 힘도 목소리도 부족했고, 그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정치판은 어처구니없이 부조리했다.
그래서 어느 특정정당의 집권이 목적이 아닌 정치개혁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기묘한 정당’이 탄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홍기빈씨는 “개혁당 386들은 이념에 대해 유보적이란 면에서 민주노동당과 다르지만,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적은 비슷하다”면서 “이들의 무의식에는 좌파이념이나 운동에 얽매이지 않고도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접근법이 내재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또한 그는 개혁당의 앞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당의 ‘실패’는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단련의 과정이며 이를 극복해낸다면 개혁당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정당개혁에 이미 실패한 열린우리당과 확실한 선을 긋고, 민주노동당이나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면서 원래 개혁당이 모였던 이유와 근거를 일깨우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환멸과 냉소에 빠진 당원들부터 추스르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게 급선무다.”

확실히 지난 1년간 개혁국민정당은 ‘실패한 혁명’이었다. 다시 출발선에 선 그들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그러나 개혁당의 ‘개미’들이 처음에 믿었던 가치들까지 싸잡아 내던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직, ‘개미들의 반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인터뷰]
"남은 것은 쓰디쓴 환멸 뿐" 한 당원의 ‘개혁당 1년’


궁금한 것은 평범한 개혁당원들의 목소리였다.
열린우리당에 가지도 않고, 비대위활동도 하지 않는 수많은 개혁당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의 침묵에는 싸늘한 냉기마저 느껴진다.

‘레드앤’이란 아이디를 쓰는 전 개혁당원이 그런 이들 중 하나다. 그는 신당에 ‘올인’하는 개혁당 집행부를 보고 지난 9월 결국 탈당을 결심했다고 한다.

12월 8일, 그와의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개혁당에 입당한 이유와 개혁당을 하면서 느꼈던 소회가 있다면.

작년 월드컵 열기와 촛불시위 등을 보고 시민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 느꼈다. 그다지 ‘정치적’이지 못했던 내가 개혁당에 입당하게 된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양성평등의 정치, 직접민주주의, 생활정치를 이제는 한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너무 오른쪽으로 쏠려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당을 통해 그것을 중간까지라도 끌고 오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개혁당 활동을 하면서 나는 그저 ‘거수기’였고 남은 것은 쓰디쓴 환멸뿐이다.


-개혁당의 한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예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우선 노무현을 위한 당이었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대선이 끝나자 ‘프로젝트정당’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유기홍, 강영추씨 등 일명 ‘유파’와 유시민의 추종자들인 ‘유빠’가 오늘날 개혁당을 이렇게 끌고 온 원인이다.
상향식민주주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점도 있다. 당게시판이 중앙당과 의사소통을 할 만한 가장 유용한 창구임에도 불구하고 당원들의 요구에 대해 집행부가 제대로 답변한 적은 거의 없었다.


-지도부에게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 아닌가.

물론 평당원들이 지나치게 순진했거나 판단을 제대로 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당원 대부분은 평범한 직장인이고 생활인이다. ‘생활정치’라는 말이 듣기에는 좋지만 직접 실현하기란 너무 어렵다는 걸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치인들이 생활정치를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개혁당에서도 소수의 명망가와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영웅주의만 판을 쳤다. 그들은 ‘일은 우리가 할 테니까 너희들은 게시판에서만 놀아라’는 식이었다.


-열린우리당에 입당해서 그 당을 바꿀 수도 있지 않나.

그 당은 한나라당 민주당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정치에서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광주진압군 출신까지도 영입했다더라. 무슨 희망이 있는가.


-오정례씨 등 현재 비대위의 활동에 대해서….

이런 말은 좀 심할 수도 있는데 오정례씨의 스탠스는 한나라당에서 사회당까지에 걸쳐 있다. 만일 그 사람이 열린우리당에 자리가 있었으면 지금 이러고 있었을까. 물론 비대위활동하는 분들이 모두 정치적 야심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개혁당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요즘 정당정치 자체에 회의를 느꼈다. 대안은 없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이 『말』지에 실린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겠는가(웃음).





[김원웅 의원 인터뷰]
"개혁당은 아름다운 정치실험, 그러나 한국현실에선 아직 이른 듯"



창당 한 돌을 막 넘긴 개혁당은 지금 법정분쟁으로 얼룩지고 있다.
11월 6일 이용휘씨 등 개혁당원이 구 집행부를 대상으로 ‘직무집행정지 및 직무대행자선임 가처분 신청’을 낸 데 이어 12월 8일에는 오정례씨 등 16명이 유시민, 김원웅 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과 세비가압류 신청을 했다.

그런 와중에 김원웅 의원을 만나 ‘개혁당 사태’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그에게 다소 공격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개혁당이 결국 김원웅, 유시민의 사당이었으며, 이들의 정치적 행보에 개미들만 희생당했다는 비판이 있는데.

그것 가지고 역정 내지는 않는다. 개혁당은 작지만 아름다운 정당이었다. 그 당을 끝까지 끌고 가려는 이들의 순혈주의적 시각을 존중한다. 나는 개혁당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내가 개혁당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내가 열린우리당에 그저 평당원으로 입당한 것이다.


-개혁당의 해산과정이 실정법상 문제가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물론 엄격히 법적으로 따지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의사결정을 해온 당이다. 그렇게 따지면 창당과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열린우리당이 기성정당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는 개혁당원들이 상당수다.
솔직히 열린우리당은 국회의원 배지 중심으로 운영되는 당이다.
개혁당의 성향과 거리 멀다. 총선에 임박하지만 않았어도 당원투표에서 신당 합류는 부결되었을 것이다.


-열린우리당에서 개혁당의 정치적 지분은 어느 정도라 보는가.

1백50명 중 20명 정도가 수치적 포션이다. 앞으로 총선 준비과정에서 개혁당 출신들이 도전하고 도약할 것이다.


-개혁당의 역사적 의미와 한계에 대해….

기성정당들이 대중을 동원대상으로 본 반면 개혁당은 참여주체로 봤다. 그리고 계급이라는 협소한 범주가 아니라 그보다 넓은 국민이라는 범주를 담아내려 한 점도 의미가 크다.
한계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인터넷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좀 이른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개혁당원들의 세비가압류 신청이 있던 12월 8일 내내, 당사자인 유시민 의원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개혁당의 탄생에서부터 최근 ‘개혁당 사태’ 전반에 걸쳐 유시민 의원이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시민 의원실에서는 인터뷰 내용이 개혁당이라는 사실을 듣자 “워낙 민감한 내용이라…”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비서관 역시 “밤 11시까지 회의가 있고 지방출장도 잡혀 있다. (의원님께서) 워낙 바쁘셔서 나도 얼굴 뵙기가 힘들다”며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 디지털말
제 211 호 2004 년 1 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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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9/23 14:2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조낸 짠하다 씨파...

    개혁국민정당에 참여했던 피끊던 민주투사 하민혁의 타락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좆도.,.. 조낸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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