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레이크뉴스 주선으로 인물과 사상에서 개혁당 관련 원고청탁을 받은 파인세븐님의 글입니다.

방대한 주제에 비해 지면의 압박이 심했음이 드러나 아쉽습니다. 원고지 177 매 분량을 57장 정도로 줄인 글이라 파인님 본인도 불만족스러워하시고, 인물과 사상쪽에서도 많이많이 죄송해 했답니다.  쩝. 그 177매 짜리 원본은 아마도 기회가 되면 시리즈로 보실수 있게 될수도 있을 듯 ^^

글 쓰시느라 가슴아픈 개혁당 홈페이지를 다시 구석구석 뒤지시며, 몇날을 밤 새우셨을 파인님이 눈에 선하네요. (안봐두 비됴~~) 수고 정말 많이 하셨습니다. 파인님은 덕분에 아쉽기만한 개혁당 1년을 다시 한번 되뇌이시면서, 많은 생각 하셨겠습니다.

아래는 <월간 인물과사상>  3월호에 실린 글 내용을  여기에 옮긴 것입니다


출처
블로그 > *시네앙
원본 http://blog.naver.com/wooa4546/140003649247





'개혁당 개미들은 신당 프로젝트의 도구나 희생물'이었나
- 김영국 자유기고가



'적어도 100년 갈 정당을 만들겠다'


  "어느 당처럼 새천년이라 해놓고 2년도 안갈 정당 안 만든다. 적어도 100년 갈 정당을 만들겠다." (유시민 전 개혁국민정당 대표, 2002.9.17)


   "유시민 의원을 비롯 열린우리당으로 간 구 집행부는 개혁당은 (현재)법적으로 유효한 실체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강탈해간 당인과 직인 및 개혁당의 자산을 조속히 반환하라." (개혁당의 존속을 위하여 노력하는 개혁국민정당 당원 일동, 2004.1.17)


   지금은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지만 한국 정당사에 있어 최초로 인터넷을 기반으로 탄생한 개혁국민정당(이하 개혁당)의 시작과 현재의 모습을 적나라게 보여주고 있는 두 주장이다.


   개혁당은 지난해 10월 31일 마지막 온라인 전당원투표에서 신당에 참여한다는 안건이 가결된 후 곧바로 다음날 전국상임위원회를 열어 "당 해산 후 (열린우리당으로) 개별입당"을 결정하고, 당시 개혁당 대표였던 김원웅 의원과 유시민 의원 등 개혁당 구집행부 인사들을 비롯 상당수의 당원들이 개혁당을 탈당하여 현재의 열린우리당으로 옮겨감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사실상 해체된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나 개혁당 고수론자들은 일찍이 개혁당을 기성 정당 (열린우리당)에 올인시키기 위하여 해체하는 데 반발하고, 개혁당 해산 결정 또한 구집행부측의 일방적인 여론몰이 끝에 편법,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며 '개혁당지키기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법적인 조치를 강구하는 등, 구집행부측과 치열한 법적,정치적 싸움을 벌이고 있다.


   흔히 개혁당 '독자생존파'라 불리는 개혁당 고수론자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구집행부측에 의해 주도된 당 해산 결정이 법적요건 불비(不備)로 말미암아 무효라는 흠결통지서를 받아낸 상태이며, 김원웅,유시민 의원을 비롯한 구당직자들을 상대로 직무정지 및 직무대행자 선임을 위한 가처분 신청 그리고 손해배상 청구소송, 일부 전 당직자에 대한 형사고소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상태이다.


   많은 사람들은 개혁당원들의 당 해산 결정으로 유시민, 김원웅 의원 등이 열린우리당으로 합류함으로써 개혁당은 사실상 해체된 걸로 아는데, 당해산 결정이 무효라는 중앙선관위의 결정은 무엇이며 또 같은 개혁당원이었던 사람들끼리 두 의원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한 것은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은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피상적인 현상일 뿐, 개혁당의 지난 1년간의 과정은 우리 정당사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많은 정치적 과제를 남겨주었다. 따라서 이 논점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개혁당의 지난 1년의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3주도 안 돼 민노당 당원 수를 뛰어넘은 개혁당 발기인 수


   개혁당의 창당은 모 방송사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당시 꽤 알려졌던 한 시사평론가의 절필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선 전인 2002년 8월 1일, 유시민 씨가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절박한 심정으로" 절필선언을 하게 된 사연은 바로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국민지지도 추락에 따른 민주당내 반노(反盧), 비노(非盧)그룹의 노 후보 흔들기로, 노 후보가 후보사퇴 압력을 받는 위기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시민 씨는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안 된 8월 2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민후보 지키기 시민운동을 발전적으로 정리하고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한 개혁정당을 만들기 위해 신당을 만들어 민주세력의 총결집에 나설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신당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정강,정책은 민주당의 것을, 정당의 구조와 문화는 민주노동당의 것을 합쳐 놓은 정당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시민은 자신이 구상하는 신당에 대해 반(反)부패, 국민통합형, 참여민주주의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미래형 정당 (이는 향후 개혁당의 4대 목표가 됨)으로서 '(가칭) 정치혁명과 국민통합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이라 이름짓고, 여의도 대하빌딩(전 개혁당사)에 사무실을 열고 당시 신당관련 홈페이지(www.vision2002.org)를 개설하여 곧바로 발기인 모집에 들어갔다 (현재 개혁당 홈페이지 주소는 www.ppr.or.kr로 바뀌었다).


   이 같은 유시민의 신당 구상에 당시 인터뷰 기사가 실린[오마이뉴스] 독자란에는 3일 만에 무려 3천여 건의 네티즌들의 댓글이 달리는 등 폭발적인 호응이 일어났다. 유시민의 말대로 어둑어둑한 들판에 불을 질러 보았더니 거기에는 마른 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고, 불길이 전 들판을 태워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 불길은 곧바로 개혁당 발기인 모집으로 옮겨 붙어 모집시작 3일 만에 온라인 가입 발기인 수가 5천여 명을 넘어섰고, 1주일 만에 1만 명을 넘어섰다. 이윽고 9월 17일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위 발족식 때에는 온라인에서 1만 7천 명 오프라인 가입자 4천여 명까지 합쳐 시작 3주도 채 안 돼 발기인 수가 2만 1천 명을 넘어서면서, 당시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열린우리당이 이런 개혁당의 방식을 벤치마킹하면서 홈페이지 개설 후 곧바로 '10만 발기인 가입하기 운동'을 펼쳤지만, 1주일 동안 고작 1천 400여명만이 온라인상 발기인으로 가입한 것과 비교하면, 개혁당 창당 당시의 온라인 참여 열기는 그야말로 한국 정당 창당사에 있어서 대단히 의미있고 색다른 기록 하나를 만들어 낸 셈이다.


'노무현의 눈물'과 '고래를 삼킨 새우'  


   유시민은 폭발적인 발기인 참여의 여세를 몰아 2002년 10월 20일, 창당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개혁당은 전체 당원 찬반투표를 통해 93.96%라는 거의 만장일치의 절대적인 찬성으로 노 후보를 대선 정책연합 후보로 결정했다. 이 날 문성근 개혁당 추진위 실행위원장은 온몸에 땀이 배도록 목 메이게 노 후보를 지지하는 열띤 연설을 해 좌중을 휘어잡았으며, 행사에 참석한 노 후보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 이 장면은 나중에 대선후보 첫 'TV광고에서 '노무현의 눈물'로 재등장했다.


   그러나 이날 창당발기인대회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비노사모 출신 당원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다가왔으며, 정당으로서 지나치게 노무현주의로 흘러가는 데 대한 비판도 일기 시작했다. 이는 개혁당이라는 정당으로서의 실체와 노무현이라는 인물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개혁당=노무현 사당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개혁당이 창당 목표대로 100년 가는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는 'Above2'라는 아이디(개혁당은 온라인 정당답게 당원들이 실명보다는 아이디를 주로 사용했다)의 당원이 '대선 이후를 준비하는 모임(약칭 대준모)'의 결성을 제안하며 당내 비판적 그룹이 자발적으로 세력화를 시도한 배경이기도 하다.


   개혁당의 창당 작업은 이후에도 착착 진행되어 2002년 11월 16일 공식 창당대회를 열 때에는, 개혁당에 참여 의사를 밝힌 당원,당우들이 3만 2천여 명으로 불어났으며 39개 지구당도 만들어졌다. '개미들의 유쾌한 정치반란', '고래를 삼킨 새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창당작업 2개월 반만에 개혁당은 당당히 '제도권 정당'이 된 것이다.


   개혁당은 창당 모토에 걸맞게 지구당위원장과 전국집행위원을 인터넷을 통한 당원 전체투표로 뽑았다. 창당대회장에선 개혁당의 1기 집행부(구집행부) 선출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창당대회 전 며칠 동안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후보 접수를 받고 진행된 집행위원 선거 또한 정당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날 유시민 씨는 호선에 의한 첫 개혁당 대표로 선임되었고 김영대 씨는 개혁당 사무총장이 되었다.


   개혁당이 창당대회를 연 지 약 한 달 후인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마디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당선이 확정되던 그 날 밤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이 민주당 관계자들과 자축행사를 치르고 나서, 곧바로 허름하고 비좁기 짝이 없던 여의도 대하빌딩 4층 개혁당사를 찾아와 개혁당 지도부 인사들을 껴안고 감사를 표시한 것은, 어쩌면 친정집 식구들을 만나 함께 감격해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개혁당은 공식 창당 한 달 만에 대통령을 만든 실질적인 집권여당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유시민의 의원 당선과 신당 제안 그리고 분열


   개혁당의 지난 1년여의 역사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상향식 참여민주주의를 보장하여 평범한 생활인들이 생활 그 자체 속에서 즐거운 정치를 함께 실험해 보고자, 유시민, 김원웅을 비롯한 구집행부측 인사들 다시 말해 당내 명망가이자 주류였던 정치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몸부림쳤던 역사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1년 간 개혁당 내에서 벌어진 주요한 사건들 중심에는 항상 이런 고민들이 깊숙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 첫 출발은 2002년 11월 23일, 당원들의 의견수렴 없이 유시민 당시 대표가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에게 입당과 함께 당 대표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했다는 언론보도가 사실로 확인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유시민 대표는 고양덕양(갑) 재보선 출마 전이었던 2003년 1월에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와 당원게시판에 올린 자신의 글을 통해, "개혁당의 목표는 2004년 총선 때 전국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는 것", "대선을 거치면서 개혁당이 더욱 독자적인 정당으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민주당과는 어떠한 재보선 공조 논의도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며 거듭 민주당과의 연합공천 논의에 쐐기를 박고 나섰는데, 나중에는 태도를 180도 바꿔 민주당과의 선거공조 방침을 천명하고 나서면서 당내 불신을 자초했다.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방침이 향후 정계개편을 위한 포석이라는 걸 눈치챈 개혁당 평당원들 상당수는, 이때부터 개혁당이 조기에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당 사수를 위하여 선거공조에 반대하자는 결집운동이 일기 시작하여 새로운 당내 비판그룹인 '평당모'가 탄생하게 되었다.


   2003년 4.24 재보선 투표가 끝나고 오후 7시 출구조사로 유시민 후보의 승리가  확실해진 시점에서, 개혁당 지도부는 전격적으로 긴급 전국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다음날 곧바로 범개혁단일정당이라는 신당 창당을 정치권에 제안했다. 사실상 정계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었으며, 이후 개혁당은 이 신당논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독자생존의 의미를 잃어 가는 결정타를 맞게 되었음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후부터 당원들은 신당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져 날카로운 대립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당은 신당논의 몰입으로 각종 주요 한연에 대해 개혁당다운 논평을 내지 못하거나 유통기간이 지난 뒤 두루뭉술한 논평으로 대응하기에 급급하면서, 많은 당원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탈당 대열에 합류했다.


   이렇게 개혁당이 창당한 지 반년도 채 안 돼 제 모습을 잃어가자 세 번 째 당내 비판그룹인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구회' (현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가 탄생했고, 당 해산투표 이후에도 시민단체형 정치적 동호회(엄밀히 말하면 시민단체와 정당의 중간형)으로 전환, 개혁당에서 탄생한 동호회 중에 여전히 일정한 활동력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가 되었다.


신당 올인 투표와 정당법 및 당헌에 배치된 당 해산 결정


   2003년 6월 13일, 신당창당 주도자인 유시민 의원과 찬성파 당원 그리고 이에 맞서 신당반대 및 개혁당 독자생존파 당원 사이에 신당관련 끝장 토론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날 토론회는 서로간에 뚜렷한 입장 차이와 그 동안 쌓여온 불신의 깊이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신당반대 패널 중 일부는 유시민 의원 등 당 지도부의 탄핵을 주장했고, 이에 유시민 의원 또한 토론 말미에 당시 서영석(현[서프라이즈]대표) 토론진행자의 상호 덕담 요청에도 불구하고 "덕담 못해주겠다.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 조직해서 당 지도부를 갈아치우라"며 굳은 표정으로 목청을 높혔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2003년 10월 27일부터 31일까지 신당 올인 여부를 묻는 마지막 전당원투표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수없이 탈당하는 과정 속에서도 그나마 남아 있던 몇 안되는 일부 당내 비판세력들은 마지막 개혁당 지킴이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결과는 찬성이 3천962명(77.98%), 반대가 955명(18.8%), 기권 164명(3.23%)으로 마지막 전국당원대회의 안건 (우리 당은 신당에 전원 참여한다. 참여방법 및 전국당원대회 결과에 따른 법률적 절차 등은 전국상임운영위원회에 위임한다)은 가결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1일엔 덕평수련원에서 온라인 투표의 효력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오프라인 전당원대회와 신당 참여방식을 결정하기 위한 전국상임위원회가 열렸다. 이날 '오프'전당원대회는 개혁당 전체 진성당원 7천여 명 중 150여 명만이 참가한 채 열려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사실상 전당원대회가 성립되지 못했고, 이어 벌어진 전국상임위원회에서는 상임위원들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표결을 통해 유시민 의원측의 주장대로 '개혁당 해산 후 우리당 개별입당'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당 해산을 결정한 것이 결국 문제가 되었다. 즉. '전국상임위원회 결의에 의한' 당 해산은, 해산의 경우 적법한 대의기관(개혁당 당헌상 당 해산을 위한 대의기관은 '전당원대회'뿐임)에 의해서만 결정할 수 있도록 한 정당법 제 39조의 규정과 개혁당 자체의 당헌에도 배치된다는 것이, 중앙선관위가 이 날의 해산결의가 무효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이유가 되었다.


   한편 개혁당의 무원칙한 해산에 반대해온 개혁당 독자생존파 당원 일부는 선관위로부터 2003년 11월 10일 해산 흠결통지서를 받아내면서부터 '개혁당 지키기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개혁당 재건을 위한 구집행부측과의 법적,정치적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소송대리인으로 조성래 변호사를 선임하고 유시민,김원웅 의원 등 구집행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개혁당 전 사무차장에 대해서는 개혁당의 집기를 강탈해가고, 예금과 당인,직인 및 사무실 집기 등을 보관하면서 반환을 거부하고, 부당하게 개혁당 청산업무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 업무상 횡령,배임 혐의로 형사고소를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한때 구집행부측과 원활한 당무 인수인계를 위하여 협상을 벌이기도 했으나, 구집행부측이 당명 변경과 개혁당 데이터베이스 일부 삭제 등 수용하기 힘든 요구조건을 제시해와 협상은 결렬되었다.


   현재 개혁당 고수론자들의 위임을 받아 개혁당측 소송을 전담하고 있는 소송대리인 조성래 변호사는, 2월 7일 본인과의 전화통화에서 "개혁당 당무에 실질적으로 깊숙히 관여했던 다른 구집행부측 인사들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소송에 승리해서 개혁당이 법적으로 온전히 부활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해산 흠결통지서와 독자생존파들의 내부 주도권 다툼


   개혁당이 일단 법적으로는 존속하게 되어 이제는 정치적으로 소생시키기만 하면 개혁당은 원상회복 되고, 개혁당 독자생존파들은 자신들이 원래 개혁당에 입당하면서 품었던 순수한 창당 정신을 그토록 주장해왔던 그대로 실현해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개혁당 재건운동을 주도했던 당원들 사이에는 당을 어떻게 재건하고 잔류당원들에게 어떻게 다시 감동을 불어넣을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누가 어떤 직책을 맡아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로 부각되어 사사건건 절차문제와 뒤섞여 홈페이지 등에서 마치 치열한 내부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구집행부가 비워놓고 간 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덩어리로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먼저 가서 찜하기만 하면 자기것이 될 것 같은 개혁당의 주요 직책들이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던 것일까. 결국 구집행부측의 일방독주를 비판하며 개혁당 독자생존을 함께 이야기해왔던 어제의 동지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자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현재 개혁당은 잔류당원 중 210여 명으로 진성당원을 다시 확정하고, 2월 14일에 일부 당헌개정과 함께 제2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오프라인 전국당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잔류당원들의 이런 고육지책이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얼마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으며, 현 개혁당 재건운동 주도세력들이 과연 개혁당의 창당 정신에 걸맞게 '성공한 제2의 개혁당 실험'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도 현재로선 지극히 불투명해 보인다.


'낙천 대상자 명단에 유시민, 김원웅이 빠진 게 불만이다'


   개혁당의 전 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않은 오정례씨는 2월 8일 본인과의 전화통화에서 다음과 같은 뼈있는 말을 남겼다.


   "어쩌면 유시민 의원을 비롯 유기홍, 강영추, 홍영표 등 실질적으로 1기 개혁당을 주도해왔던 핵심적인 사람들이 개혁당의 간판으로는 2004년 총선에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일찌감치 내리고, 자신들이 그려왔던 시나리오대로 그들 나름의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집요하게 추진해온 신당창당 프로젝트에 개혁당 개미들은 하나의 도구나 희생물에 불과한 존재로 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개혁당 재건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송재신 씨는 " 지난 2월 5일 총선시민연대가 2004 낙천 대상자를 발표하면서 유시민과 김원웅 의원을 빼먹은 것에 대해 솔직히 불만이다. 이들은 결국은 자신들의 입지만을 위해 소속 당을 일방적이고 불법적으로 강제 해산해가면서 열우당(?)으로 옮겨간 셈이다. 이들이야말로 순진한 개미들을 팔아먹고 간 대세 추종형 철새 정치인이 아닌가 "라고 주장하고, " 이들을 정치적으로 응징하고 개혁당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총선에 유시민 의원의 지역구인 고양 덕양갑에 출마해서 당선은 몰라도 유시민 의원만은 반드시 낙선시키도록 노력하겠다 "며 의지를 불태웠다.


   사실 유시민 의원은 열린우리당 중앙당에서 경선없는 총선 단일후보로 조기 확정했으며, 일부 의원은 경쟁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세나 현역 기득권 때문에 단일후보로 확정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개혁당의 신당논의 과정에서 당 지도부와 그 추종 세력들의 행태에 실망하여 일찍이 탈당했던 박영수 씨는 " 결국 가치 지향적인 아마추어들의 생활정치는 현실 속에 퇴색해지고, 현실 지향적인 프로들의 정치생활에 의해 장악되고 이용당하는 현실을 지켜보았다 "며 자신의 짧은 개혁당 생활을 회고했다.


   개혁당원들은 개혁당에 가입할 때 저마다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개혁당의 존폐가 걸린 중대한 문제들마저도 일부 소수 지도부가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대외적으로 공표하면서, 중앙이 당원들의 꿈을 해석하고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개혁당은 큰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고, 개혁당 지도부와 이들에 찬동하는 당원들 그리고 개혁당 독자생존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당내 비판그룹이 주류, 비주류로 갈리어 종착역을 향하여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폭주기관차가 되어갔던 것이다.


개혁당이 남겨준 교훈


   평범한 생활인들에 불과한 개미당원들은 개혁당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세력들처럼 정치 자영업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를 상층부에 전달하고 관철하기 위한 세력을 조직화해 내기가 어려웠고, 주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생활인들의 보편적인 아마추어리즘 또는 '귀차니즘'과 어우러지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도, 실망스럽다고 여겨질 때마다 힘없이 탈당 버튼을 클릭해 갔다. 어쩌면 이런 게 생활정치 실험이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1차적 한계였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 명망가나 운동권 출신 정치엘리트 등 정치적 입지가 중요한 정치생활인들과 직장인 등 일상의 평범한 생활정치인들이 한데 뒤섞여 정치를 할 때에는, 그 내부에 상향식 참여민주주의의 틀이 제도와 문화로서 확고하게 정착되지 않는 한, 유쾌한 정치반란으로서 생활정치는 현재 한국 정치 풍토에서 온전히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것을 개혁당이 교훈으로 남겨준 셈이다.


   비록 일부 사회 명망가와 운동권 엘리트 등 정치생활인으로 구성된 개혁당 상층부의 정치적 입지 중시와 상향식 참여민주주의 구현에 대한 투철한 의지 부족  그리고 개미당원들의 미숙 등으로 개혁당의 새로운 정치 실험은 수많은 순수한 개미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 채 서서히 어둑한 들판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지만, 개혁당은 한국 정당사에서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전국적으로 수만 명씩이나 모아내고, 기성 정당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정치문화를 이 땅에 태동시켜 보고자 한 첫 시도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어찌되었든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고 나면 들판에는 다시 새싹이 돋을 것이고 언젠가는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된 마른 풀들로 뒤덮일 것이다. 그때 또 누가, 어떤 계기로 정치의 들판에 새로운 불씨를 던질지 모를 일이다. 부디 그때에는 지난 1년여 동안 겪은, 화려한 출발과 초라한 결말의 개혁당의 경험이, 또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소중한 거울이 되어 그들을 비추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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