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남한산성

2009/11/01 20:16 / 책갈피
언젠가부터 뉴스가 요설들의 잔치가 되고 있다. 당장 최근의 용산참사 판결과 헌재의 미디어법 유효 결정 논란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넌센스 같은 말장난들은 김훈이 그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말한 '뱀의 혀'를 연상시킨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등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뱁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안주安州가 무너졌다는 장계는 청병淸兵이 안주를 떠난 지 사흘만에 도착했다. 적들은 청천강을 건넜을 것이다. 바람이 몰아가는 눈보라에 말발굽이 일으키는 눈먼지를 포개며 적들은 다가오고 있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 <남한산성>의 처음 세 단락이다.

적의 말발굽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기름진 뱀과 같은 말로 서로 다투는 것 외에는 달리 대책이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힘이 부재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노선 싸움은 항용 말싸움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며, 이때 소통의 도구인 말은 오히려 산맥처럼 솟아 유의미한 결단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뿐이다.

이른바 세계화로 불리는 전지구적 변화의 높은 파고 앞에서 이를 여하히 넘어설 것인지로 세계는 거의 전쟁에 버금가는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우리만 예외인 듯 보인다. 날마다 첨예한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어떻게 힘을 길러 전지구적 변화에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는 찾아보기 힘들어서다.

허구헌날 벌이는 다툼은 거의 기름진 뱀과 같은 말의 잔치일 뿐이다. 마치 병자호란 당시 대신들이 벌이던 말들의 싸움이 다시 재연된 듯한 모습이다. 400년을 갈고 다듬은 그 혀놀림은 더 정교해졌으며 그리하여 말이 가로막고 선 산맥은 더욱 높고 현란해져 있다는 인상이다. 더구나 현대는 만인이 제각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고 무엇보다 미사여구가 만들어가는 이미지의 시대가 아니던가.

온갖 기름진 미사여구로 치장한 세 치 혀의 요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덧>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고 했던가. 글을 써넣고보니 글에 내용이 없다. 이 글의 단초가 된 몇몇 '요설들'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지 않아서인 때문인데.. 이 글은 그냥 여기까지만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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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sunlight 2009/11/01 23:4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선지자 님 //

    확실히 그렇습니다.

    오늘의 상황은 조선시대의 정치논리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동서남북인, 노론소론, 벽파시파...
    저마다 한 자리씩 걸치겠다고 민생은 외면한 채 패거리 정신이 투철했지요.

    무한경쟁의 시대, 글로벌 경제의 파고 위에 험남한 바다를 항해애햐 하는 이 시점에서
    사이버 공간의 젊은이들이 안쓰럽게만 느껴집니다. 노회한 정치가들이 던진 꼼수 섞인 떡밥을 알아보지 못하고 덥썩 문 채 퍼득이는 저 어린 군상들...

    벌써 어떤 절망과 좌절을 느꼈던 것일까요? 몇 마디 말에 발끈해서 거친 쌍욕을 해대는
    저 어린 아이들, 청년들... 저들이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일 수 있을까요?

    • 하민혁 2009/11/02 01:37  편집/삭제  댓글 주소

      공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 쓰면서도 살짝 어거지에 가깝다 여기고 쓴 글이었습니다

      뉴스를 보고 블로고스피어 그리고 트위터 등에 쏟아지는
      말도 안 되는 넌센스를 보면서..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지요

      진짜 남한산성의 저 '뱀의 혀'가 생각나서 한마디 한 거였습니다
      편가르기에 함몰된 맹목적인 증오와 비난..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4. sunlight 2009/11/02 17:0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하민혁 님께 //

    외로운 블로그 포스팅으로 연일 피곤하신 하민혁 님께 잠시 위안이 되도록
    노래 하나 선물합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8585833&q=%BF%EC%C1%F6%B8%B6%B6%F3

    요즘 유행하고 있는 김양의 '우지마라'입니다.(울지마라는 "홍도야 울지마라"로 나오니 좀 주의...)

    혹시 하민혁 님의 품격에는 맞지 않는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제가 요즘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좋아하는 노래라서요.^^

    그런데 이 동영상은 노래 자체나 김양, 즉 가수가 좋다기 보다는 백 댄서들의 동작이 특이해서
    추천합니다.(저는 처음에 김양의 노래 때문에 듣기 시작했는데, 이 동영상의 백 댄서가 훨씬 더 인상 깊게 보이는군요.^^ 저는 사실 안무나 댄스 이런 것 잘 모르지만 …

    노래 가사는 운명론이나 태평론 등 기득권자의 편에 선 내용입니다. "좀 괴로운 게 있어도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라는 식이니까요.

    이 동영상을 찍은 사람은 아마 아마추어인 것처럼 보입니다.(제게는 어떤 프로페셔널보다도
    유익했지만요.) 왜 아마추어로 생각하냐 하면 프레임이 영화의 롱 테이크처럼 고정되어서지요.
    전체적으로 6~7번 정도 프레임이 바뀌는데 방송국의 정규 프레임이라면 60~70번 정도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처음부터 왼 쪽 편에 나오는 두 명의 댄서가 백미입니다. 거기서 더 순위를 매겨보자면 처음 등장한 댄서는 2위, 그리고 이어서 등장한 댄서가 1위(전부 잠자리 안경을 썼지만 나중에 1위는 불편한지 잠시 벗는군요) , 나머지 댄서들은 3위(이 동영상에서는 전부 다 깔끔해요.)

    어쨌든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sunlight이지만, 가수보다도 댄서들의 춤 동작을 보고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안무 또는 댄서를 만든 분이 대단한 실력파인듯 싶습니다.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시대적 표현을 가장 잘 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양의 동영상을 20편 이상 찾아 봤는데 이 영상처럼 댄서의 동작을 잘 표현한 게 없었습니다.

  5. .... 2009/11/05 18:55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병자호란을 다루고 있는 소설 <남한산성>의 도입부를 이루고 있는 첫 세 문장이다.
    병자호란을 다루고 있는 소설 <남한산성>의 도입부를 이루고 있는 첫 세 문장이다.
    병자호란을 다루고 있는 소설 <남한산성>의 도입부를 이루고 있는 첫 세 문장이다.

    ㅋㅋㅋ

    세 문장이라...
    요설이로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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