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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밥상에 쭈꾸미가 올랐다. 이웃이 시골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걸 맛이나 보라고 조금 건넨 모양이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부지런히 몇 젓가락을 놀리는데 아내가 눈짓을 보낸다. 옆에 있는 아이 한번 보라는 것이다.

우리집에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사내아이와 내년에 입학하는 딸아이가 하나 있다. 딸아이는 아주 씩씩한데 사내아이는 (내가 보기에) 좀 그렇다. 두 아이가 연년생이 아니면서도 내년이면 한 학년 차이로 학교를 다니게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원래 2학년이어야 할 큰 아이지만, 작년에 학교를 다니기에는 '좀 그래서' 취학이 1년 늦어진 것이다(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뭐 큰 문제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아이의 행동들이 때로 '좀 그렇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녁 밥상에 올라온 쭈꾸미를 보고 아이가 보인 행동 같은 게 그런 예다.

아내의 심상치않은 눈짓에 따라 아이를 보니, 아이가 쭈꾸미를 먹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걸 하나씩 포크에 담아올린 다음 이리저리 살피기만 하고 있었다. 벌써 몇 개째를 그렇게 들어올려 살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기에 말했다. 먹는 거 갖고 뭐해? 장난하지 말고 언능 먹어.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아이가 포크에 담아 들고 있던 쭈꾸미를 내밀면서 물었다. 이거 춤 추는 거 맞지? 그러더니 미처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제멋대로의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춤 추다가 잡힌 거고 이건 뜨거운 물에 삶는 바람에 놀라서 펄쩍 뛰고 있는 거고...

결국 아이는 밥상을 물릴 때까지 쭈꾸미는 하나도 먹지 않았다. 쭈꾸미를 음식으로 보질 않고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있으니 제딴에도 그게 먹힐 리가 없었을 터다. 답답했다. 그건 그런 게 아니다고 뭔가 말을 해줘야 할 것같은데 그 일이 쉽지가 않았다.

사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비슷한 일이 이전에도 있었다. 밥상에 오른 멸치볶음을 놓고 멸치가 눈을 뜨고 있어서 못 먹겠다고 하는 바람에 둘째 아이까지 한동안 멸치 보기를 뭐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뭐 뾰족한 설명은 하지 못 했다. 고작 이건 음식이니까 먹어도 된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눈 뜬 멸치 먹이기와 진보 개혁 드라이브


솔직하게 말해 지금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 했다. 어디서 어디까지를 설명해야 눈 빤히 뜨고 있는 멸치를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먹게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모든 걸 단순한 하나의 틀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이 세상의 복합적인 여러 현상들을 조목조목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기란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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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놓고 이야기하자. 지구상에 회색은 없다. 우리가 회색으로 알고 있는 것은 모두 흑과 백의 일정한 비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라. 회색은 인간의 눈이 만들어낸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자연계에 실재로 존재하는 색은 흑 아니면 백이다."

인터넷 초창기에 <온라인24>라는 인터넷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다가 지금은 정치웹진 <서프라이즈>의 대표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렬님의 글이다. 쭈꾸미를 먹지 못 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문득 동렬님의 이 글이 생각났다.

예전에 그와 진보와 보수에 대한 개념을 두고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회색지대'라는 언론비평 위주의 시사문화 사이트를 운영할 때였는데, 그는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논리를 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토론을 하자는데 이게 웬 설법이냐"고 내가 이야기를 끊었고, 그래서 논쟁은 더는 진행되지 못 했다(이건 입장의 차이 이상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 일 뒤에도 오프에서 만난 적이 있다. 뭔가를 도모하기 위해서였고 내가 부탁하는 쪽이었다. 암튼).

위에 옮긴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창간 1주년 축사에 대해 김동렬님이 답하고 있는 글이다. "노대통령의 기고에 답하여 - 성공하면 영웅이 되고 실패해도 전설이 남는다"는 제목을 내건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회색은 없다고 주장한다.

"까놓고 이야기 하자. 회색은 우주 안에 없다. 자동차의 엔진은 결코 중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길은 언제나 왼쪽 아니면 오른 쪽이다...오로지 개혁이 있을 뿐이며, 오로지 진보가 있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주장은 늘 화통하다. 그래서 참 편하다. 말하는 사람도 편하고 듣는 사람도 편하다. 모든 것이 분명하므로 선택에 거리낌이 없고 망설일 이유 또한 없다. 그는 "회색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흑 아니면 백"을 말한다.

그의 진보와 보수에 대한 논리도 여기에 근거해 있다. 기실 그가 하는 주장이란 모두가 하나로 보아 무리가 없다. '진보는 좋고 보수는 나쁘다' 혹은 '진보는 있으되 보수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번에도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오로지 개혁이 있을 뿐이며, 오로지 진보가 있을 뿐이다"고. 그러므로 열심히 '진보' 하고 부지런히 '개혁' 하라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있다.

답답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멸치가 눈을 뜨고 있어서 못 먹겠다는 우리집 아이가 생각난 건 이 때문이다. 세상을 다각도의 관점과 다자의 인식틀 속에서 보려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가진 하나의 관점과 하나의 틀 속에서만 보려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무척 닮아 있다.

통신보안.
2003-11-08 오전 7: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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