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PM 11:14' (11:14, 2003)를 봤다. 이 영화에 대한 어떤 이의 상당한 찬사에 힘 입어서였다. 이런 경우 늘 그렇듯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관련 평들도 상당 부분은 줏어들은 후였다. 그래서였을까? 별로 재미없이 본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런저런 시덥잖은 영화 평들은 걷고, 이 영화가 갖는 장점(미덕도 아닌)을 굳이 하나 찾는다면 그것은 딱 하나다. "'지나가는 사람 2', 혹은 '여인 3'의 반란"


영화 'PM 11:14'


영화나 연극에서 우리는 주인공 곁에서 죽어 나자빠지거나 스쳐지나는 무수히 많은 소도구들 - '행인 2', 혹은 '여인 3'들과 마주친다. 그리고 그때마다 항상 맘속으로 반문한다. 언 넘의 목숨 혹은 사랑은 저다지 중요하고 사무치는데, 언 넘의 목숨 혹은 사랑은 왜 저렇게 하찮고 허무하기만 한 것인가?

'지나가는 사람 2' 혹은 '여인 3'이 주인공만큼의 절통한 관계와 무수한 사연을 가지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카메라 앵글이 돌아가는 것과는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저들 '지나가는 사람 2' 혹은 '여인 3'을 좇아 나름대로의 상상을 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상상이란 기껏 해야 몇 커트에 머무르고 만다. 우리는 그 영화의 감독이 아닌, 감독의 상상력을 좇아야 하는 관객에 지나지 않기에.

감독이 이같은 관객의 욕구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그려내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시공간상의 제약 때문이다. 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그려낸 감독이 있다. 바로 영화 <펄프 픽션>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다. 내가 보기에 영화 'PM 11:14' 라는 영화는 '펄프 픽션'의 한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얘기가 약간 옆길로 샜다. 암튼, 지금 이 영화를 보고 내가 해두고싶은 말은, 이같은 영화의 출현이 역사적 흐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대의 반영 혹은 소산이랄까.. 이제 시민은 더 이상 '행인 2'나 '여인 3'으로 남으려 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지나가는 사람 2 혹은 여인 3의 반란"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보면, 가까이는 지난 총선이 그렇고 지난 대선이 그렇고 군부 시대를 마감케한 시민 운동이 또한 그러했다. 이인화의 소설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또한 다른 맥락에서는 하나의 징후적인 작품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영화 <주먹이 운다> 또한 같은 계보에 속하는 영화로 볼 수 있겠고.

작업 시작했다. 횡발수발은 여기서 이만 접고..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통신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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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빈치 코드' 아이콘과 '행인2'의 반란

    Tracked from 하민혁의 통신보안 2008/01/21 17:34 Löschung

    소설 '다빈치 코드'를 읽었다. 휴일 동안, 블로그 포스팅하는 짧은 시간을 제하고는 한번도 손에서 놓지 않고 단숨에 읽어내려간, 흡인력이 대단한 소설이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마치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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