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비디오 한 편을 보고난 다음 그 기대로 다시 하나 구해서 본 비디오가 아주 재미없을 때 갖게 되는 기분을 아는가? 살짝 덥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고 난 지금의 내 기분이 그렇다.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이인화의 소설을 읽고는 거기에서 받은 어떤 기대감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었다. 여기서 내가 기대감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자가 어떤 상을 수상한 소설이고 후자 역시 연륜이 있는 대단한 상을 수상한 소설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니. 거기다 제목부터가 벌써 그럴싸하지 않은가. 그래서 기꺼이 거금을 투자했고(나는 웬만한면 책을 잘 안 산다) 밤을 새울 작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헌데 이게 웬? 숫제 넋두리를 듣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살아남은 자는 누구이고, 그가 슬퍼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

1992년 제1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그러나 읽기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뭔가를 기대했다. 뭔가가 있을 듯싶어서였다. 인내하였다. '쇼에서 조용필이 먼저 나오는 거 봤어? 스타는 나중에 등장하는 거라고. 이 소설도 마찬가질 거다. 이 소설에서도 진짜 이야기는 나중에 나오게 될 거라고.' 이런 생각으로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아가며 책을 읽었다.
  
인내하며,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가 어느 시기쯤에서인가는 나오겠지' 하는 그런 기대로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도록 이야기는 지지부진이었다. 하여 급기야는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책 읽기를 그만 두지는 않았다. 아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소설이 그래도 이 나라에서는 적잖은 무게를 지닌 무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책의 뒷면에는 역시 우리 문단 내지는 지식인 사회에서 적잖은 무게를 지닌 해당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그럴듯한 치사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들로부터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다는, 내 자신 저들과 같은 건전한 양식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어쩌면 소박하달 수도 있는 그런 생각으로 나는 끝까지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난 후, 나는 책을 방 한 쪽 구석으로 던지고 말았다. 그것은, 대개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기 마련인 평소의 책읽기 습관을 견지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어떤 불만의 표시였다. 별로 진지하지 못한 어떤 넋두리를 듣느라고 시간만 죽이고 말았다는, 한마디로 말해 영 젬병인 그런 기분이었다. 이런 치기어린 글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누군가의 횡설수설하는 넋두리를 흔쾌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일도 그리 언짢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소설이 갖는 어떤 짜임새 있는 형식이나 서사적인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이 그 기대치에 닥아설 수 있기란, 모르기는 해도, 글쎄, 나로선, 어쨌거나, 상당한 어려움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또 모르겠다. 평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같은 소설 쓰기가 90년대식 사고의 한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니, 그런 90년대식 사고를 가진,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읽으면 거기엔 또 무언가 그럴듯한 내용과 형식이 역동적으로 충격할 수 있을려는지도 말이다.


우리에게 80년대는 무엇인가


황석영

황석영이 쓴 광주민중항쟁의 다큐멘터리


8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80년대를, 오월 광주를 노박 밥 말아 먹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80년 광주의 5월이 있고 나서, 모든 이는 광주의 열사였고 그것을 침 튀겨가며 이야기하기 바빴다는 사실을. 또 알고 있다. 저들은 광주의 영혼들을 위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기에 더 바빠했다는 사실을.

내가 본 저들은 5월 광주를 판명한 사실과 명확한 역사적 인식에 바탕하여 규명 혹은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뒷전이었다. 오히려 표피적인 현상에 매달려 한 두개의 극적인 사례를 선전하기에 더 진력하였고, 나아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저 그것을 팔아먹는 데만 더 열심이었다.

우리는 4.19를 이야기한다.

그 날의 일을 정의의 행진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통상 '4.19 세대'로 불리는 이들의 작태는 자주 우리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고, 조만간 우리가 보게 될 '80년 세대'의 행태 또한 거기서 멀리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양자는 그 궤적을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없는 자랑으로 떠벌이고 다닌다. 그것을 무슨 훈장이나 되는 듯이 늘상 수식어구로 달고 다닌다. 부끄러움 하나 없이. 아니, 뻔스럽게 그걸 부끄러워 하면서.

학창 시절 한번쯤은 들춰봤기 마련인 '성문기본영어'에 다음과 같은 예문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 그 지진에 관한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 사람들 대부분이 그것을 하나의 조크로 얘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영국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그 사건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걸 분명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구경이 구경 중에는 대단한 재미를 주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지진에 대한 저 코 큰 이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를 보면 저들이 꼭 이런 불구경을 하고 있는 짝으로 보인다. "와, 내가 그때 거기 있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블라블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건 비단 저 코 큰 애들만이 아니다. 4. 19 세대들에게는 4.19가 바로 이런 불구경인 짝이고 80년대 사람들에게는 80년대가 꼭 이런 불구경인 형국이다. "80년 5월에 그때 내가 말이지.. 횡발수발~"    

그러나 저 코 큰 이들은 그럴 수 있어도 우리가 같은 행태를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저들에게는 그 지진이 피할 수 없는 천재(天災)였기에, 그들은 어쩌면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기에, 저렇듯 불구경하듯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4.19나 80년의 그것은 천재가 아닌 인재(人災)랄 수 있는 것이겠기에,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방관자일 수가 없고, 하기에 저들처럼 불 구경하듯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의 4.19나 80년은 살아남은 자들이 결코 방관자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나 모종의 부끄러움에 숙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면, 우리는 되려 그것을 무슨 영광된 추억이나 되는 듯이 너무 드러내놓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듯이만 보인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제 몫만은 모두들 제대로 챙겨 그 영화로움을 다하고 있다. 다만 죽은 자들만이 그 대열에서 밀려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설사 살아 있대도 그들이 밀려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4.19나 80년대를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80년의 이야기가, 80년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러므로 이 소설과 같은, 이처럼 희닥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건 어쩌면 '슬픔'을 가장한 자기변명 내지는 사실의 호도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footnote]솔직히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소설 제목부터가 어딘가에의 빌붙음이고 진실의 호도는 아닌 것인지? 나로선 이도 심히 의심스럽기만 하다.[/footnote]

본질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어설픈 호도로 말미암아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도록 바로잡아야 한다. 어설픈 자기 변명으로 얼버무리거나 희닥한 논리로 사실을 호도하는 것은 분명해야 하는 것을 분명하지 않게 만드는 사이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오래 전 노트에 적어둔 글이다. 글을 쓸 쓸 엄두가 나지 않아 이 글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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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무한 2009/05/16 23:2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조만간,
    살아남은자의 기쁨을 하나 써야겠습니다.
    알렝드보통처럼 말입니다.
    <젋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썼다죠.

    • 하민혁 2009/05/17 23:52  편집/삭제  댓글 주소

      오, 그거 멋진 일이겠습니다.
      근데, 이건 저는 글빨이 딸려서 안 되겠고 무한님이 하나 쓰시면 대박이겠습니다. ^^

  4. sunlight 2009/05/17 02:42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하민혁님.

    갑자기 <살아 있는 자의 슬픔>이라니... 요즘, 심경이 좀 복잡하신듯...

    그 박일문이 무슨 현대문학상인가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 이후로 활동이 별로 없어서 저도 꽤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저는 독문학을 공부했기에 박일문의 소설 제목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제목을 차용한 것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 재미 없어서 못 읽어요. 재미가 없기는 한데 말하자면 나치나 악의 세력으로부터 맞서지 못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에 대한 회상, 뭐 그런 겁니다. 나치의 광기로 수백만명의 유태인이 학살당한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브레히트의 시는 큰 영향력을 가졌지요. 아시다 시피 브레히트는 동독의 가장 유명한 극작가에다 문학이론가에다 시인이었죠.)

    박일문의 소설이 나오고 이인화(김철균)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가> (정확한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네요. 역시 술을 먹어서) 하는 소설이 나와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그동안 내가 모르는 소설이라도 썼나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 대뜸 이런 기사가 뜹니다.

    동아닷컴 뉴스

    기사입력 2006-09-19 02:59

    ... 1999년 4월 함께 술을 마시고 만취한 여대생 J 씨를 성폭행한 뒤 혼인을 빙자해 수차례 간음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박 씨는 2002년 1,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당해 2003년 7월 형이 확정되자 잠적했다. 박 씨는 198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고뇌를 다룬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1992년 제16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제가 보기에 박일문은 절묘한 시기에 소설가로서 첫발을 내딛었고 (당시는 일본의 그 유명한 소설가 <상실의 시대>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와 국내에서는 윤대녕, 신경숙 등의 소설가들이 이른바 감성의 소설을 쓰던 시대),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또한 자기의 과오와 상관 없이 무거운 사회 현실을 떠않은 데 대한 감성적 토로에 불과한 소설로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하민혁님이 말한 4.19나 광주사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박일문이 어쨌든 괜찮은 소설을 썼고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어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성공했고 그가 다른 곳에 빚진 것은 없다고 봅니다. (제목의 거창함에 속아서 허탈하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요.)

    4.19에 대한 얘기도 그렇습니다. 한국사에서 가장 민주주의의 횃불을 밝혀주는 4.19이지만, 그것은 미완의 혁명 또는 개혁이었습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전체 국민의 의식과는 괴리된, 지식인의 항거 또는 지식인의 주장에 맹목적으로 따른 젊은 지성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4.19는 국민 전체의 체화된 의식이 아니라, 독재라는 체제에 대한 한정적이고 무력한 집단의 우발적인 결과라는 것이지요.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4.19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전체의 의식이 그에 따라주지 못했던 일부 엘리트 의식의 소산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4.19보다는 80년대의 세파를 겪었는데, 역시 그런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민혁님의 체험을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가장 객괸적으로 이야기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가 가장 궁금한 것은 '역사의 발전'이라는 의식이 과연 보편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광주항쟁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보면, 당시 '이 시점에 우리가 나아가게 될 방향'이 어떤 것인가는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트들이 고민했던 대목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필연이었다고 봅니다. (이 역시 엘리트 의식이지만) 그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재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민주화의 열기를 억압으로 막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었지요.)

    그러던 차에 광주 유혈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광주에 대한 이야기는 신군부의 통제로 해서 외부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만 뉴스로 나왔고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몇 년이 지나서 알게 되었지만, 하여튼 한국 현대사에서 아마 가장 큰 역사적 사건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인 안목으로 들여다 본 광주의 투쟁은 그리 선명하지가 않습니다.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의식보다는 '옆에 있던 대학생이 끌려 가기에 화가 치솟았다'는 식의 감정적인 이야기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 감정은 당연하고 정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그처럼 많은 유혈을 불러왔다고 생각되지는 않거든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저는 일부 엘리트의 오버 센스 내지는 권력욕에 수많은 민중이 희생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하민혁님의 체험을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다른 때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요.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어쨌든 모든 방면에서 우리가 성숙해가야 하고, 이번처럼 경제 문제에 너무 걱정하지 않으면서 우리 나름대로 알콩달콩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가 경제 10위니 어쩌니 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음미하면서 사는 풍토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이 가장 행복도가 높다는 아이러니도 있지만요.)

    하민혁님의 건필을 빕니다.

    • 하민혁 2009/05/18 02:34  편집/삭제  댓글 주소

      가볍지 않은 부문의 얘기를 넘 많이 해주신 터라 답글을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사실 요 며칠 동안은 거의 짜투리 시간밖에는 활용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

      5.18에 대한 얘기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싶습니다. 지금 얘기한다고 해서 큰 의미도 없을 뿐더러 그로 인해 입게 될 내상만 오히려 클 성부러서입니다.

      다른 얘기에 대한 답글은 내일 다시 올리겠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댓글 늘 고맙습니다.

  5. 장웅진 2009/05/17 12:42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http://opencast.naver.com/SP260/38 에 소개합니다.

  6. 제이디 2009/05/18 13:5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그러게요... 무슨 419 518 기념사업회 같은거는 본거 같은데
    TV에서 보니까 518 생존자들이 맨날 잠못자고 알콜중독에 애들 패고
    비관자살하고 애들한테도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는데
    별 도움의 손길도 없는 거 같더군요. 엄한 짓하지말고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좀 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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