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인 1983년 5월22일 워싱턴 교포사회가 주최한 `광주의거 희생자 3주년 추도식'에서 낭독한 자필 추모사가 공개됐다는 보도다.

보도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이 글에서 "우리는 조국분단의 한, 독재 정치의 한, 군인정치의 한, 빈부 양극화의 한 등 한의 국민이다"며 "광주의거는 한을 풀고자 일어섰던 것이며 그 한을 안은 채 좌절된 또 하나의 한의 사건이다"고 규정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광주의거는 확실히 한을 풀고자 일어섰던 사건이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그 본질은 사라지고, '살아남은 자'들의 축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다음은, 수년 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적은 감상문(?) 중 일부다.


살아남은 자는 누구이고, 그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앞쪽 부분을 적는 일은 무의미하겠기에 모두 싹둑~! 하고, 5.18 광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전하고 있는 부분만을 옮긴다.

8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80년대를 노박 밥 말아 먹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80년 광주의 5월이 있고 나서, 모든 이는 광주의 열사였고 그것을 침 튀겨가며 이야기하기 바빴다는 사실을. 그러나 저들은 기실 저 광주의 영혼들을 위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기에 더 바빠했다는 사실을.

기실 저들은 저간의 사정을 어떤 명확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규명하거나 규정지으려는 노력보다는 표피적인 현상을 까발리기에 더욱 진력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저 광주의 영혼을 팔아먹는 데만 더 열심이고 있었다.

우리는 4. 19를 이야기한다. 그 날의 일을 정의의 행진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통상 4. 19 세대라는 이들의 작태를 보면 그 한심함이란 80년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저들의 행태 역시 80년대의 그것과 그 궤적을 같이 하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더없는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듯이만 보인다. 그것이 무슨 훈장이나 되는 듯이 늘상 수식어구로 달고 다닌다. 부끄러움 하나 없이. 아니, 어쩌면 뻔스럽게 부끄러워 하면서.

성문기본영어라는 책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그 지진에 관한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 사람들 대부분이 그것을 하나의 조크로 얘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영국 역사에 기록된 가장 큰 그 사건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걸 분명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구경이 구경 중에는 대단한 재미를 주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지진에 대한 저 코 큰 이들의 행태를 보면 저들이 꼭 이런 불구경을 하고 있는 짝인 듯이 여겨진다. 헌데 이런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비단 저들만이 아니다.

4. 19 세대들에게는 4. 19가 바로 이런 불구경인 짝이고, 80년대 사람들에게는 80년대가 꼭 이런 불구경인 형국이다. 그러나 저 코 큰 사람들은 그럴 수 있어도 우리가 같은 행태를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저들에게는 그 지진이 피할 수 없는 천재(天災)였기에, 그들은 어쩌면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기에, 저렇듯 불구경하듯 이야기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4.19나 80년의 그것은 천재가 아닌 인재(人災)랄 수 있는 것이겠기에,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방관자일 수가 없고, 하기에 저들처럼 불 구경하듯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의 4. 19나 80년은 살아남은 자들이 결코 방관자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나 모종의 부끄러움에 숙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는 되려 그것을 무슨 영광된 추억이나 되는 듯이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이런 사정은 4.19나 80년 이후의 우리의 행태를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제 몫만은 모두들 제대로 챙겨 그 영화로움을 다하고 있다. 다만 죽은 자들만이 그 대열에서 밀려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설사 살아 있대도 그들이 밀려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 다름아니다.

80년의 이야기가, 80년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러므로 이 소설과 같은, 이런 희미한 방식으로 제기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어쩌면 '슬픔'을 가장한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슬픔은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호도되어서는 안될 터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소설의 제목부터가 어딘가에의 빌붙음이고 진실의 호도는 아닌 것인지? 나로선 이도 심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본질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분명한 것은 분명해야 한다.

얼버무리거나 호도하는 것은 분명해야 하는 것을 분명하지 않게 만드는 사이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어쩌면 그런 행태에 속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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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straea 2006/05/15 18:4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그냥 제게 확실한건.
    제가 논하기엔.. 눈물과 가슴 답답함이 저를 덮친다는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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