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가 정체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그 요인 가운데 하나가 '근친교배 문화'다. '끼리끼리의 문화'라고 부름직한 '패거리주의'는 하나의 사회가 태동하여 변혁을 거치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패거리의 도움이 없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인류는 수많은 변혁기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변혁기마다 거쳐야 했던 헤게모니 싸움이란 실은 누가 더 충실하고 많은 패거리를 만드는가 하는 싸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느 패거리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회색분자일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려난 인간군에게 두 가지의 특정한 행동양식을 강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패거리에 동화되는 행동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헤게모니의 행방에 따라 스스로의 모든 것을 맞추는 기생적 행동양식이다. 이는 우리의 짧은 현대사만을 보더라도 익히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 전쟁 당시 태극기와 인공기를 번갈아 흔드는 행동양식이며, 몇 번의 공화국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행동양식이다.

역사와 패거리주의, 그리고 패거리주의의 한계

영화 <로베레장군>의 한 장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를 처형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레지스탕스가 아님을 주장하며 억울해 하는 한 시민에게 레지스탕스가 던지는 이 말은 변혁기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양식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이같은 패거리주의를 통해 도도히 흘러왔다. 그 흐름을 방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역사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의 역사가 이러 했으므로, 미래의 역사는 이러할 것이다는 식의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는 이를 가리켜 흔히 '한갓된 역사주의'에 매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민혁의 민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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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늘 스스로를 새롭게 변혁해 왔다. 토마스 쿤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패거리주의의 한계다. '끼리끼리의 연대'는 변혁의 과정에서 절대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일단 변화를 넘어 안정기에 들어가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패거리주의는 이제 스스로의 한계가 되고 만다. 역사는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려왔다.

패거리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근친교배'다. 근친교배가 갖는 단점은 열성인자가 유전된다는 점이다. 식물의 경우에도 근친교배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암수가 같은 줄기에 있는 나무의 경우 대개는 수술이 아래 있는 방식이다. 암술이 아래쪽에 있는 경우 근친교배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붕당 놀음에 머무를 것인가 변혁의 역사를 만들어갈 것인가

한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변혁기를 넘어 안정기에 접어든 경우에도 사람들은 예의 저 패거리주의라는 갑옷을 쉬이 벗으려 하지 않는다. 이는 논공행상이나 우월감의 표시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편의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고 봐야 한다.

이를테면, 특정한 사안에 대한 방송 멘트를 따거나 기사 인용이 필요한 경우 대개는 주위에서 쉽게 접근 가능한 사람을 찾아 묻게 마련이다. 결국 특정한 곳에 자리를 잡는 사람은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과는 별개로 끊임없이 그 주변을 맴돌거나 기웃거리는 사람인 경우이기가 십상이다.

오늘날 언론이 보이고 있는 난맥상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같은 '패거리주의'에 있다. 몇 개의 언론사가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사에 유리하다싶은 언론은 상호 띄워주기를 통해 과대포장을 해가면서까지 치켜올리고 자사의 이익에 배치된다싶은 언론은 철저히 까거나 무시하기로 일관하고 있는 게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또한 오늘날의 언론은 "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가 물면 기사가 된다"고 믿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같은 인식은 '이제 박물관에나 모셔져야 할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민주통신>을 통해 이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시민 각자가 패거리가 아닌 자신의 두 발로 우뚝 서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혁명이란 다른 누구로부터의 해방(혹은 혁명)이 아니라 시민 각자로부터 비롯되는 혁명이어야 한다고 믿는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2005/01/18 22:10  통신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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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이디 2009/04/17 00:3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여기서 괜히 비난댓글도 달아보고 점잖빼는 댓글도 달아봤는데
    그건 다 익명을 빌어 쉽게 쉽게 써본건데 뭐 신경도 안쓰시겠죠.
    사실 제 본심은 엄청나게 주저하고 아니다 싶은 건 하지말자 주의라서
    정치학 레포트도 몇날며칠 열중해서 기한 넘기고 제출할 정도예요.
    나름대로 정치발전의 정의까지 내려가면서 내긴했는데 기한 넘겨서 점수는 좃될듯..
    (거창한 건 아니고 "거의 모든 이가 살만하고 서로 돕기도 하는 세상"
    이거 하나만 보고 "거의 모든 이가 살만하고 서로 돕기도 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깎아 없애나가는 것이 정치 발전이라고 생각..
    물론 살만한게 삼시세끼하고 옷하고 집있는 거만 얘기하는 건 아니고
    그것에 개인 나름대로의 자유로운 삶까지 더한... 할말 못하면 좃같으니깐..)
    암튼 그만큼 뭐를 쌓아올린 게 없고 허물고 허물기만 하고 있거든요.

    (갑자기 왠 자기 고백인지 웃기시겠지만 오늘은 쓸 말이 생각 안나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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